독일 여행기

도착

도착

드디어 독일에 와 버렸지 뭐야.

험난하고 어이없고 창피했던 입국 심사. 다시 생각하니 그때의 긴장감보다 헛웃음이 나온다.

입국심사장, 코로나 이후 독일 공항 역시 대규모 인원감축을 알고는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국인 게이트 한 명, 외국인 게이트 두 명. 직원이 달랑 세 명뿐이었다. 대한항공 승객 대부분은 나같이 한국인이다 보니 대기 줄은 끝이 없었다. 융통성 없는 독일인들, 내국인들 수속이 다 끝난 직원은 휴대폰만 들여다볼 뿐 놀이공원 대기 줄 마냥 끝없이 이어진 외국인 심사대 쪽과는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작정한 듯했다. 한 시간쯤 지나 드디어 심사대 앞에 섰다.

어느 나라나 입국 심사 직원들은 무표정에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도록 교육받는 것이 틀림없다. 내 담당 직원도 그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웃음기라곤 좁쌀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있을 거니? 어디 있을 거니? 돌아갈 티켓은 있니? 왜 왔니? 언제 돌아갈 거야? 티켓 보여줘.

내 앞의 다른 사람들은 별 무리 없이 통과시켜 주더니 왜, 어째서, 나에게만 질문이 쏟아지는 건데? 내 인상이 불법 이민자나 테러리스트 혹은 난민처럼 보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그의 질문을 다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인 것은 그럼에도 내 입술이 달라붙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꿀 먹은 벙어리라는 얌전하고 순한 표현은 그 경우 해당하지 않는다. 난 그냥 오십 넘은 바보 멍청이였다. 입술은 강력 에폭시 접착제로 붙여 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고 발성기관이 다 녹아버린 것처럼 신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당황하면 이런 거로구나. 무슨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잠재적 범죄를 저지를 계획도 없는데 그깟 입국심사 하나에 왜 그런 엄청나게 쪽팔리고 부끄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나 자신조차 이해불가였다.

‘오케이 나, 니 말 다 알아들었어. 난 17일간 있을 거야. 딸네 집에서 지낼 거고 당연히 왕복 티켓 있어. 8월 4일 돌아갈 거야. 여기 티켓 있어.’ 그러나 그건 내 머릿속에서만 재생된 대답이었다.

그런데 17일이 영어로 뭐였더라? 8월 4일은 어떻게 발음하더라? 딸이 영어로 뭐였더라? 결과적으로 가장 큰 폭탄은 휴대폰에 저장해온 왕복 티켓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뒤죽박죽 얽혀버려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깟 영어 한 마디 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지금껏 여러 나라를 다니며 그렇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었다. 처음은 그렇게나 당황스럽고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아, 몰라, 영화 대사처럼 나 돌아 갈래~. 외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열차가 달려드는 것처럼이나 당황스러운 순간 본능적으로, 혹은, 구세주의 음성처럼 옆 게이트의 젊은이가 술술 영어로 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청년의 팔을 잡았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최대한 간절하고 불쌍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좀 도와줘요.”

“당황하면 그럴 수 있어요. 당황하지 마세요.”

청년의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신의 음성처럼 들려왔다. 내가 한 마디도 못했던 것을 청년이 나 대신 술술 대답했다. 드디어 내 여권에 입국허가 도장이 쿵 소리를 내며 찍혔다.

청년의 도움을 받아 나는 무사히 입국 심사장을 빠져나왔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 주저 없이 잡아주었으면서 정작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건 자존심도 뭐도 아닌 오만과 자만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남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간절함 없이 살았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들고 지금처럼 숨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데도 표시 내지 않고 살려고, 단지 나 답지 못하다는 허울에 숨어 살았다.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할 만큼 옹졸하고 비겁했다.

청년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를 했다. 청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내 인사에 고개를 꾸벅 한 뒤 짐 찾는 곳으로 총총 사라졌다.

내 짐은 또 왜 그리 늦어 터진 것인지. 밖에서 기다릴 딸은 엄마나 애가 탈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맨 나중에나 나오려나 보다 기웃거릴 때 막 컨베이어 벨트를 타기 시작한 내 캐리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속할 때 까지는 남편이 도와줬지만 35킬로나 나가는 것을 어떻게 내려야 하나 걱정하는 순간 옆에서 나처럼 수화물을 기다리고 있는 건장한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저 죄송하지만 저 캐리어 좀 내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대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다.

“아, 그럼요. 물론이죠.”

잠시 뒤 그분은 무거운 내 캐리어를 번쩍 들어 내 두 발 앞에 세워주었다. 두 번째 의인이었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내 눈에 누구보다 크게 보이는 내 딸과 사위, 그리고 사위가 안고 있는 커다란 꽃다발.

아, 그래 나 그거 로망이었다. 공항에 입국하며 꽃 받는 것. 기특하다 우리 사위, 장모 마음 너무 잘 아는구나. 속으로 흐뭇해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입국심사대 앞에서 당황해 죽고 싶었던 아줌마는 어디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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