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의 사랑

목마른 대지위로 차별없이 내리는 소나기 같은 사랑을 꿈꾸며!

by 김혁

연일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던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들었다. 곧이어 시원한 소나기가 큰 산맥 위로 힘차게 쏟아져 내렸다.

=비다! 기다리던 비가 온다!

오랜 가뭄으로 목이 바싹 타들어가던 산하대지는 장대 같은 빗줄기를 맞으며 일제히 춤을 추었다. 마침 하늘에 길게 걸린 무지개를 따라서, 소리 없는 환희의 송가가 천지에 가득 울려 퍼졌다. 흰 구름이 되어 오랫동안 하늘을 떠돌던 물방울들은 함께 떨어지다가 높은 산등성이를 사이로 헤어졌다.

=잘 가! 한 곳에만 머물지 말고, 여기저기 다니며 멋진 여행을 하길 빌어!

=그래,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고, 열심히 흐르다가 나중에 다시 또 만나!

빗방울들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뒤,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서 흐르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흘러내린 물방울들은 깊은 계곡을 지나 강물과 합쳐진 뒤, 어느 농촌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마침 저녁 무렵이라, 하루 일과를 마친 한 늙은 농부가 강물에 삽을 씻고 있었다. 허리가 잔뜩 구부러지고, 얼굴에 주름이 밭고랑보다 더 깊게 패인 그의 긴 한숨소리가, 쑥대가 무성하고 빈 농약병과 폐비닐로 뒤덮인 들녘을 가득 메웠다.

=이 늙은 농부마저 떠나고 나면, 저 가여운 들판은 어찌될까---.

물방울들은 눈물을 흘리며, 늙은 농부의 거친 두 손과 얼굴과 삽을 몇 차례나 곱게 씻겨준 뒤 다시 먼 길을 떠났다.

한참 흐르다보니 문득 속도가 느려지면서 저수지처럼 길이 막혔다. 짙은 안개가 낀 듯 물이 탁해서 앞이 잘 안보이고, 물고기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숨을 헐떡였다. 알고 보니 커다란 보가 강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닥에는 썩어가는 이끼들과 죽은 물고기들의 잔해로 가득했다.

=흐르는 강물을 억지로 막다니, 고인 물은 썩는다는 걸 왜 모를까!

물방울들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한참을 울었다. 그 바람에 탁한 물이 조금이나마 깨끗해졌다. 그걸 위안으로 삼고, 보에 생긴 틈새로 겨우 탈출해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그 후로도 좋은 일과 궂은일들을 숱하게 겪으면서 열심히 흐르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서해 바닷가의 조그만 항구였다. 항구 주변에는 빛바랜 노란 리본들이 한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여러해 전에 하늘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을 기리는 리본들이었다.

=얘들아, 정말 미안해---.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행복하길 빌어!

물방울들은 아직도 바다에 남아서 떠돌고 있는 수많은 눈물방울들과 얼싸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방울들도 깊은 계곡을 지나 강물과 합쳐진 뒤, 어느 농촌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마침 저녁 무렵이라, 하루 일과를 마친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강물에 몸을 씻고 있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 몽골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서툰 한국말로 즐겁게 웃고 떠들었지만, 속으로는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고향의 강에서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헤엄치며 놀던 때를 그리워하는구나!

물방울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지친 얼굴과 몸을 몇 차례나 곱게 씻겨준 뒤 다시 먼 길을 떠났다.

한참 흐르다 보니 어느 대도시 근처에 다다랐다. 강가에는 주민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와 오물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인근 공장에서 흘러나온 오폐수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강물을 온통 썩게 만들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숨을 헐떡였다.

=인간들은 너무해. 환경이 오염되면 자기들도 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왜 이럴까---.

물방울들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한참을 울었다. 그 바람에 탁한 물이 조금이나마 깨끗해졌다. 그걸 위안으로 삼고, 오폐수 틈새를 겨우 탈출해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사연들을 겪으며 열심히 흐르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동해 바닷가의 어느 원자력 발전소 부근이었다. 오래전에 세워진 발전소는 이제 너무 낡고 붕괴 위험이 있어서 가동을 멈추고, 해체될 날만 쓸쓸히 기다리고 있었다.

=10만 년 동안이나 열심히 기도하며 기다려야 상처가 치유된다니, 너무 가슴이 아파!

물방울들은 근처 바다를 떠돌고 있는 이웃나라 원전 붕괴사고로 방출된 방사능 오염수들을 만나 하염없이 울었다.


마침내 서쪽으로 여행한 물방울들과 동쪽으로 여행한 물방울들은 만나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다도해의 곱고 따뜻한 품안에서 행복을 만끽하면서, 지난 여행을 돌이켜 보았다.

=그동안 가슴 아픈 일도 많이 겪었지만, 마음씨 예쁘고 착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일어서려는 희망과 용기를 보았어. 참 멋진 여행이었어!

그들은 또다시 흰 구름이 되어 하늘을 마음껏 떠돌다, 장대 같은 소낙비가 되어 목마른 산하대지를 흠뻑 적시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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