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독사

죽을 때까지 반성을 모르는 어떤 무서운 신념

by 김혁

노인은 밤이 이슥할 무렵 불을 끄고 침상에 누웠다. 하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이 탓에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데다, 근래 들어 부쩍 심해진 속병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거센 바람소리에 심란하여 몸을 자꾸만 뒤척였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믿었던 옛 부하에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몽땅 날리고, 외국으로 이민 간 아이들도 몇 년 째 소식이 끊기는 바람에, 노인은 비좁은 지하 단칸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며칠에 한 번씩 들리는 동네 마트 주인과, 가끔 외출해서 만나는 친구 한 두 명 외에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다.

노인은 요즘 들어 이처럼 잠 못 드는 밤이면, 지난 시절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이렇게 심약해진 것 또한 나이 탓일 것이다.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가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소리칠 것만 같아서 흠칫 놀란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밖에서 울부짖는 바람소리가 마치 자신을 향해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들렸다.

허허, 내 초라하고 가여운 영혼이, 저 바람을 따라 병든 육신에서 빠져나가려고, 삐거덕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만 같구나!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떳떳해! 암, 그렇고말고! 내가 수행한 그 많은 일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서 저지른 것이지, 내 책임이 절대 아니야. 따지고 보면 나도 일종의 피해자야.

오, 불쌍한 내 영혼이여!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조금만 기다려라. 널 자유롭게 풀어 줄 테니까---.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이 든 노인 앞에, 그의 젊을 때 모습과 똑 닮은 사내 하나가 말쑥한 차림새를 하고 나타났다.

“누, 누구여?”

노인이 비몽사몽간에 놀라서 물었다.

“날세. 너무 그리 놀라지 말게.”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어디서 본 듯 낯이 많이 익었다.

“글쎄, 누구냐니까?”

노인이 약간 역정을 냈다.

“허허, 잘 보게. 내 얼굴을 이제 깡그리 잊었는가?”

사내가 더욱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자네는---?”

“그래, 이제야 알아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는가?”

“뭐, 그럭저럭. ---근데 어쩐 일로 이렇게 날 찾아왔는가?”

“왜, 내가 못 올 곳을 오기라도 했나?”

“그, 그게 아니라, 너무 뜻밖이라서---.”

“늘 자네 생각을 했지. 그리고 때가 되면 한 번 찾아보리라 마음먹었지. 하지만 좀처럼 사정이 허락지 않아 미루다가 이제야 찾아왔네.”

“음, 자네가 날 그리 생각해 주는 줄은 정말 몰랐네.”

“거 무슨 섭한 말씀을---. 내가 어찌 자네를 잊을 수 있겠나?”

“그랬구먼.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닐세. 내가 자넬 잊으면 도리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어쨌거나 이리 찾아와 줘서 고마우이.”

“정말인가?”

“정말이고말고. 근데 지금 보니 자네 참 잘 생겼구먼.”

“허허, 다 자네 덕분이지 뭐. 한창 젊을 때는 자네도 그런대로 괜찮았었지.”

“이제 보니 우리가 진즉에 만났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쑥스럽게 또 왜 이러시나. 너무 갑작스레 친한 척 하지는 말게.”

“그래, 미안하네. 하지만 자꾸 옛 정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럼 하나만 물어봄세.”

“뭘 말인가?”

“자네가 평생 해 온 그 일들 말일세. 그것에 대해 아직도 그처럼 당당하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혹시 후회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잘못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을 하는지, 옛 정을 생각해서 정직하게 말해주게.”

“그래, 솔직히 인정할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내 손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시무시한 간첩이나 반국가 사범으로 둔갑을 한 것을.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처참하게 망가져간 것을.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친인척들까지 철저하게 망가져간 것을.

그들이 무죄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내가 다 기획하고 조작하고 추진하고 처리한 일들이었으니까. 물론 내 혼자서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지, 내 위에 있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이 시킨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양심의 가책이나 인간적 번민을 느꼈을 법하지만, 천만에. 난 그런 사치스런 감상에 전혀 빠지지 않았어. 아니, 빠질 여유가 없었어. 그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말이지만, 국가라는 대의를 위해서 때로는 무고한 희생양도 필요한 법이라고 굳게 믿었지.

그래, 그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희생양이었지. 그래서 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지. 날 어둠의 세력이라고, 아니 악마의 자식이라고 얼마든지 욕하고 비난해도 좋아. 마치 악마가 신과 은밀한 계약을 맺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듯이, 난 국가와 당당하게 계약을 맺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니까.

세상에는 말이지, 선 못지않게 악도 필요한 거야.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고 떠벌리지만, 그런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 같은 어둠의 세력도 존재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사실 그들이 부르짖는 그런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도 참 많이 변했지. 무엇보다도 개인보다 국가를 중요시하고 신성시하던 미덕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서 안타까워. 정말 큰일이야. 그런데 최근 들어서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고, 인생을 헛산 것처럼 후회가 밀려올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불치병으로 죽음이 임박한 지금, 난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어. 처음엔 이런 몹쓸 병에 걸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오히려 하루빨리 죽고 싶을 정도로 편안해. 요즘 주변에서 암에 걸려 죽어가는 인간들이 어찌나 많은지 몰라.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지. 인간 자체가 암 덩어리니까,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다음 날 아침, 노인은 깨어나지 못하고 영영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각 신문 부고란에 그의 사망을 알리는 짤막한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전직 고문기술자 000씨 지병으로 별세. 한 달여 만에 고독사로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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