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초대

잃어버린 사랑의 진실을 찾아서.

by 김혁

길이 없어서 발 딛는 곳이면 어디든 다 길이 된다는 몽골.

벌써 대여섯 시간째 차를 타고 달려도 대평원만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난생 처음으로 가슴이 송두리째 뻥! 뚫리는 것 같았다. K를 포함한 여섯 명의 관광객을 태운 러시아 구닥다리 승합차 <푸르공>은 연식이 꽤나 오래 되어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지만, 단순 무식하게 생긴 그대로 비포장 길에서 엄청 잘 달렸다.

'길 없는 길' 위의 여행은 아주 특별한 감동을 선사하였다. 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들이 멀리 뒤쳐져 따라오는 바람에, 다들 천국의 아이들처럼 행복해 하였다. 바퀴가 돌에 부딪칠 때마다 연신 엉덩이가 들썩이고 머리가 수시로 천정에 닿았다. 그래도 유쾌하고 통쾌하기만 했다.

지리에 매우 익숙한 운전기사도 벌써 몇 번째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네비를 연신 들여다보지만, 주위에 특별한 지형지물이라고는 전혀 없고, 눈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푸른 초원뿐이니 별 소용이 없다. 하지만 용케도 길을 잘 찾아서 간다.


K가 몽골 여행을 계획한 건 순전히 여행안내 책자에서 읽은 신화 이야기 때문이었다.

몽골 사람들은 ‘초원의 푸른 늑대와 숲속의 흰 사슴 사이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 얘기를 읽는 순간, K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연인이었다가 이제는 헤어져 남남이 된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몽골 여행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속에서 거세게 끓어올랐다.

오랜만에 K의 전화를 받은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는 약간의 반가움과 그리움, 그리고 그보다 더욱 커다란 아픔과 강한 반발심과 깊은 회의감 같은, 빛바랜 애증의 그림자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근데 왜 하필 몽골이야?”

그의 뜬금없는 제안에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거기엔 애시 당초 정해진 길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대.”

“그래서?”

“우리 실패한 사랑도, 거기서는 혹시 소중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황막한 고비 벌판을 휩쓸어가는 원초의 바람을 맞으면서 실컷 울다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도 조금은 드러나지 않을까? 그럼 서로에게 남은 상처도 깨끗하게 지워질 것만 같고---.”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깨끗하게 잊기 위해 떠나자고?”

“응.”

“좋아.”

그렇게 해서 K는 어렵사리 그녀와 함께 몽골로 여행을 떠나왔다.


대초원에서는 해가 훨씬 늦게 졌다.

마침내 지평선을 장엄하게 물들인 황혼 속으로 한참을 더 달려, 어두워진 뒤에야 일행은 겨우 숙소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 허브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벌판은 온통 허브 천지였다. 어두운 초원 저 너머에서는 야생 늑대들이 눈을 빛내며 낯선 여행자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늦은 저녁을 대충 먹고 배정된 게르 안으로 들어서자 역한 양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늑하고 편안했다. 단순하고 소박한 실내 가구를 둘러보자니 제법 유목민이라도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반쯤 열려 있는 천정으로는 밤하늘이 보였다. 전깃불 대신 밝힌 희미한 등 덕분에 K는 그녀와 둘이서 함께 캠핑을 다니던 생각이 났다.

“술꾼들 말에 의하면 몽골 보드카가 러시아 것보다 훨씬 더 맛있대. 밀과 물맛이 좋은데다, 아랍에서 알콜 만드는 법을 처음 들여온 것이 몽골이라서 그런 가봐. 자, 한 잔 해!”

K가 너스레를 떨며 과장된 몸짓으로 병을 따고 보드카를 잔에 따랐다. <칭기즈>라는 상표답게 병 표면에 칭기즈칸의 늠름한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멋진 재회를 위하여!”

“멋진 망각을 위하여!”

두 사람은 재회의 어색함과 가슴속에 잔뜩 쌓인 앙금을 감추기 위해 거푸 잔을 높이 들었다.

무색무취의 순도 높은 몽골 보드카는 영험한 주술사처럼 영혼 속에 꽁꽁 숨어 있던 온갖 비밀과 음모와 아픔들을 몽땅 풀어놓았다. 이윽고 술에 잔뜩 취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난 얘기를 시시콜콜 하면서, 요란하게 울고 웃고 난리굿을 벌였다.

“지난 세월동안, 나는 늬가 만든 사랑의 인질이었어!”

그녀가 붉게 충혈이 된 눈으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바보야, 나야말로 너의 인질이었어!”

K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내가 인질이었다니까. 이 나쁜 놈아!”

“그래, 맞아. 나 흉악한 인질범이었어! ---미안해!”

“---사실은 나도 잘한 게 하나도 없어!”


밤이 깊어가면서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였다.

바람소리는 세상을 온통 날려버릴 듯 광포하게 울부짖었고, 미처 닫지 못한 천정 위에서는 천 조각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문득 여자가 벌떡 일어나 옷을 훌훌 벗더니, 게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 알몸으로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

“거짓말-!”

“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너를 사랑했다는 말도 거짓말이고-!”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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