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 한쪽에 시간, 다른 쪽에 돈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법

by 김효민





살면서 누리는 모든 물건이나 서비스를 혼자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돈이 곧 그 해결책인 세상이다. 그리고 옛 시절보다도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남들 다 하는 거 나만 못하고 사는 것도 불행해지는 세상이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정말이지 공평하게도 많은 돈을 벌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어있는 것도 세상이다. 혼자만의 시간이나 가족과 보내는 시간, 또는 건강이나 때로는 미래나 과거. 그중에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조차도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다. 요즘 같은 불경기라면 더욱 그렇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도 그 탓에 일이 줄어서 때때로 나는 출근도 하지 않고 무급으로 집에서 놀아야 했다. 당연히 월급은 줄었고 간신히 식비나 충당할 정도였다.


곧 나아지려니 하고 1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동안 나는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고 사고 싶은 옷, 보고 싶은 공연 또한 다음 기회로 미뤘다. 미용실도 1년에 한 번 밖에 가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를 그저 질끈 동여매고 살면서 '어차피 일하느라 늘 묶고 있는 걸, 뭐.'라는 말로 나 자신을 속였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늘 나의 욕망은 월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숨 죽이고 있었고 그 족쇄는 슬슬 한계를 맞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직을 결정했다. 역시나 불경기인 탓에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 수 있는 직장은 거의 없었다. 전 직장처럼 일이 없는 회사 거나, 또는 너무 많은 회사 거나. 달리 선택지가 없어 일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했다.


특히 겨울철 일이 바빠서 9월에서 다음 해 2월까지도 계속 잔업이 있고 주 6일 근무도 아무렇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고 봄 여름에 남편처럼 휴일이 많은 것도 아니다. 즉 나는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휴일이 적은 대신 특근수당은 꼬박꼬박 나오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버는 곳이다.


나는 이제 먹고 싶은 것을 굳이 참지 않는다. 제멋대로 자라고 꼬불치던 머리카락도 싹둑, 윤기 나게 다듬은 후에 거슬리던 흰 새치들도 염색으로 모두 사라졌다. 오래간만에 새 옷도 사고 늘 탐내던 어깨 마사지기를 샀다.


하지만 이제 과거에 설레며 기다리곤 했던 빨간 날은 없다. 황금연휴도 없다. 특근수당이 나오지만 어쨌든 당연스레 출근하는 날이다.


그래도 보장되는 주 2일의 휴무는? 평일 내내 밀렸던 만남들과 집안일만으로 반 이상은 사라진다.


여유 있게 잠에서 깨어 오늘은 무엇을 할지 아침을 먹으며 찬찬히 계획을 세우고 찬찬한 만큼 여유롭게 세워진 그 계획들을 생각대로 실현시키는 휴일은 이제 없었다. 나의 행복이었는데.


로또 1등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만한 시간과 돈만 있으면 되는 건데.


게다가 일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고 많다 보니 8시간이 그리 짧지 않은데도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내 모든 감각과 정신이 쉴 틈이 없다. 나의 주된 스트레스도 그것이다.


솔직히 말할까? 이 직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면 그만큼 얼마 안 되는 휴일은 더욱 소중해지고 더욱 의미가 커진다.


쉬고 싶다.


억울하기까지 하다. 지금 손에 쥔 것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까?


이런 생각을 하며 퇴근하는 길이었다. 터덜터덜 관성으로만 발을 움직이며 걷는데 남편의 연락이 왔다.


남편의 회사도 요즘 불경기라 일이 없지만 일이 없어서 쉰다 하더라도 임금의 70퍼센트는 보장해 주는 유급휴가다. 그 휴가가 또 다음 주에 나흘이나 된다고 한다.


퇴근길 그 연락을 받고는 관성으로 움직이던 발도 멈출 만큼 온몸에 기운이라는 것들이 다 말라버렸다. 순간 남편이 밉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남편이 쉬는 게 싫은 건 아니다. 남편은 이런 휴가가 있을 때면 늘 집안일을 도맡아주고 나의 어리광도 관대하게 받아준다. 나도 그만큼 편해질 텐데 왜 남편에게 짜증이 나고 그가 미웠을까?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괜히 섣불리 그에게 불똥을 튀게 하지 않으려고 남편의 카톡을 잠시 미뤄두고 생각에 잠겼다.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단 나는 남편이 쉬는 게 싫지 않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도, 지금보다 내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었다.


남편처럼 나 또한, 살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요즘은 다들 말하는 불경기였고 시간이 많았던 이전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지금 이곳으로 옮겨온 건 그래, 나의 선택이었다.


선택지가 적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한 일은, 시간보다는 돈을 택했었던 것.


그래서 지금 이 불만을 아무 데도 말할 수 없어 나의 속만 까맣게 그을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카톡에도 계속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소소한 일들만 할 수 있으면 족한데. 이전 회사에 다닐 때는 그 소소한 용돈이 부족했고 지금 회사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이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곳에 나의 박탈감이 있었다. 내가 한 선택인데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건 워라밸, 그 양쪽 저울을 어디로 얼마나 기울게 할지를 내가 맞추지 못해서였다.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다. 요즘 경제가 그러니까. 그럼 다른 누군가를 원망해야 할까?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내 저울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아마 나도 누군가를 거리낄 것 없이 미워하고 이유 없이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잖아.


누군가를 탓하고 미워하면서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결과들을 외면하는 것 말이다. 쉬운 질투보다 어려운 현실 수용, 쉬운 포기보다 어려운 현실 극복, 쉬운 무기력보다 어려운, 첫 발자국을 내딛는 용기 같은 것들 말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나를 괴롭게 한 그 원인들과 똑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그저 사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었지.

그래서 우선은 나 자신을 달랬다.


맞아, 억울하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회사에서 벗어나 쉬고 싶은 마음도 너무 간절해.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 억울하고 아쉽지. 내가 예민하고 주제넘은 게 아니라 나 같은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거야. 내가 이렇게 느끼는 건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상황이 그래.


더 기가 막힌 건 억울한 현실이어도 지금 당장 던져버릴 수도 없지. 그건 무책임하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개미가 기어간다. 하지만 땅바닥을 기어가는 개미의 눈이 아니라 기어가는 개미를 바라보는 인간인 나의 눈높이도 있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그 눈으로 나와 내 상황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의 인생은 정말 이런 억울함과 박탈감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가?


대답은 '아니다' 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출근할 때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기분 좋은 공기가 있었고 그런 오뉴월이라 퇴근하고 나서도 날이 이렇게 밝다. 이어폰에서 조용한 재즈도 흘러나와 쓸쓸하지 않은 퇴근길이다.


발끝만 바라보다 그냥 눈을 바로 들었을 뿐인데 보이는 하늘도 저렇게 아름다운데. 한순간에 나를 온통 짓눌러버렸던 나의 억울함 같은 건 노을 지기 직전의 빛바랜 파스텔톤 하늘색에 잠깐이지만 분명 지워졌었다. 그 하늘을 배경으로 일렁거리는 가는 나뭇가지와 진초록색 잎사귀들에서도 왠지 멍하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바뀌지 않는 현실보다 어디 아무 벤치라도 찾아 앉아서 이 바람과 이 하늘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아직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있는데. 지금 못한다고 그 일들을 포기하면 나중에 시간이 많을 때는 내 마음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나도 모르게 아, 하고 깨달음의 탄성이 입 밖에 나왔다.


내가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는 와. 사람의 인생은 모르는 법이니까.


언젠가 반드시 오는 그때가 왔을 때, 기다린 만큼 즐기면 돼.


그렇게 나는 다시 웃었다. 카카오톡을 열어 남편에게 다시 즐겁게 답장도 했다. 나도 곧 집에 도착한다고, 거의 다 왔다고.


그렇게 오늘도,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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