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답 속에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정답'
왜 사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으며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도 그대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 게 아니라서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길고 길었다.
매 순간 헤매는 기분에 막막하기 그지없어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데 그런 순간에도 시간은 흘렀다. 밤은 아침이 되고 난 또다시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삶의 의미나 성취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배고픈 몸에 밀어 넣을 밥을 벌러 나가기 위해서였다. 몸 만을 위해 사는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기쁘고 충만한 순간들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피곤하고 바쁘지만 힘을 내서 손님에게 웃어드렸을 때 돌아오는 같은 미소라거나, 장바구니가 찢어져 두 손이 모자랄 때 자신의 것처럼 함께 물건을 주워주는 지나는 사람들의 여러 손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치는 쓰레기를 기꺼이 가까이 가서 제 손으로 줍는 사람들도 분명 이 세상에 있다. 세상은 절망과 허무만으로 가득 찬 곳은 절대로 아니다.
내가 삶이라는 길을 울며 휘청거리며 걸을 때도 세상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왜 그걸 깨닫지 못했을까?
세상을 보는 나의 시야가 너무 좁았기 때문이겠지.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soul)'의 주인공인 '조 가드너'도 그랬다. 나처럼 아무것에도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재즈라는 음악이 있긴 했지만, 그 음악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도 나처럼 시야가 좁았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삶이라는 것 전부가 허무하다 느꼈다.
그는 오로지 재즈에만 마음이 두근거렸기 때문에 그것만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전부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 이런 점이 같았다.
영화 소울에서는 '불꽃'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그것은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이 세상에 오기 위해, 그래서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음악이거나 운동, 도구, 자동차 등 불꽃은 사람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될 수 있고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 다른 불꽃을 가질 수 있었다.
삶의 목적은 태어나는 것뿐, 달성해야 할 목적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어떤 것이든지 계기라든지 시작은 있어야 하기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꽃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 일터.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내가 받은 최고로 강한 충격은 나의 불꽃을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조 가드너가 착각했던 것처럼 불꽃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지 '삶의 목적'이나,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불꽃은 있었다는 말이다.
왜 사는지 몰라서 매일을 울었던 그때의 나에게도 불꽃이 있었다니, 내가 몰랐을 뿐이었다니, 그게 너무 충격이었다.
다시 한번,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그건 '희망'이었다. 어떤 순간이든 무슨 일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 그걸 깨달은 계기조차 너무나 사소해서 지나칠 뻔했다는 것을 얘기해두고 싶다.
매일을 눈물로 살던 그즈음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럴 만한 힘이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죽을 것같이 힘들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죽는 건 싫다면 살아야 했으니까.
과거나 지금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철학과 인문학적 강연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내가 불 같은 사람이라면 불처럼 살든가, 물 같은 사람이라면 물처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거 같아서 심리학과 사주팔자도 공부해 보고,
나를 알기 위한 각종 설문이나 어떤 테스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써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조금씩 연습할 수 있었고 나를 위한 행동에 주저함을 없앴고 내 영혼과 마음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그것들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듣는 방법을 익혔다.
그런 시도를 하기 전의 나는, 슬프거나, 방황하거나, 위기에 빠졌을 때, 나 자신을 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건 자연스럽게 나를 탓하는 결과가 되었다.
'내 책임이다'.
'내가 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
'더 해냈어야 했다'.
내 탓을 하는 잘못된 방법으로, 세상에 인정받으려고 했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 속 점 하나인 내가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게 맞는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과 다른 '정답'을 찾았다.
나라는 사람을 먼저 옳게 세우니 세상도 바뀌었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지만 세상을 보는 나의 눈과 귀가 옳게 작동하기 시작한 거겠지.
삶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 목적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세상도 지금 내가 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당장 내가 힘들고 버거워도 그런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들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고 결국 그런 힘으로 인해 세상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그걸 알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이 내게는 필요했다.
파괴하려는 힘은 그 목적을 달성해 무언가를 파괴한 순간 끝나지만, 만들어내려는 힘은 무언가를 만들어낸 후에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려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결국 둘 중에 무엇이 끝까지 남을지는 분명하지.
비록 내가 죽기 전에 세상이 완전해지지 않더라도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1mm 정도 향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얼마나 방황하고 때로는 퇴보하더라도 괜찮다. 결국 마지막 날까지 옳은 곳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괜찮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살아야 하는지, 즉 자신의 삶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내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내가 희망을 깨달았듯이.
그것이 나 자신이든 내가 혐오하던 타인이든 아니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유라든지.
그 무엇이라도 당신이 모른다면 알기 위해서 노력해 보라.
나도 나 자신을 알게 된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처럼 사소하고 작은 행동에서도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불꽃 혹은 정답은 존재했다.
그러니 당신의 삶도 바뀔 것이다.
무엇이든, 작은 것이라도.
당신이 이전보다 알게 된 답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