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속의 뿌리가 되어 광복을 피워낸 그분들을 생각하다
꿀처럼 달던 잠을 갑자기 쳐들어오는 알람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끝내고 맨 처음 화장실로 들어간다. 까끌한 입안에 칫솔을 밀어 넣으면서도 눈은 떠지지 않았다.
겨우 세수를 하고 나와서는 배가 고픈지 식욕은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기도 전에 뱃속에 연료를 채우듯 대충 집히는 대로 식탁 위에 있는 빵이나 밥을 채워 넣는다. 먹을 게 없다면 커피라도 들이붓는다.
말했다시피 입맛은 없다. 하지만 오전을 버티려면 무엇이라도 먹어야 하니까.
그리고 나와 똑같이 졸리고 지겨운 감정을 반반씩 섞어둔 얼굴을 한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 출근을 한다.
하루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회사생활은 지루하거나 짜증 나거나 무섭거나 불편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나 창피하거나 실망스럽거나 후회스럽거나 억울하다.
하지만 기를 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을 마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는 동안 날뛰던 내 감정과 생각을 하루 종일 붙잡고 티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써버려, 속이 빈 껍데기가 되어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와 먹고 씻는 것만으로도 끝이 아니다. 전쟁은 아직도 남았고 그렇게 늦은 밤 침대에 누워서야 간신히 하루 종일 웅크려 견디면서 갖은 상처를 참아낸 나를 돌아볼 정신이 든다. 하지만 때론 그런 생각도 못 하고 잠이 들기도 한다.
내일도 모레도 변함없이 이런 날이다. 한 번쯤 더 웃을까, 한 번쯤 더 화가 나거나 한 번쯤 더 슬플 뿐이지 매일매일이 다를 것이 없다.
어차피 매일매일 즐거울 수 없는 인생이라면, 매일매일 새로운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인생이라면, 굳이 이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즐거움은 잠깐이고 지루하고 지겨운 일상들은 몇 배나 되는 이 삶을.
그렇다. 살아야 한다.
나는 어떻게 이 나라에, 이 시대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내가 노력한 것이나 이룬 일이 무엇이라도 있었나? 누구도 그런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운 좋게 이 시간에 이 땅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런 나의 행운은 누군가의 불행이 먼저 심어졌기에 그 자리에 피어난 꽃과 같았다.
나의 뿌리가 되는 그는 나와 다른 시간에, 대략 100년 전 태어났을 것이다.
이 땅이 물 위에서 솟아난 이래 100년이란 참으로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 간발의 차로 그는 100년 전에, 나는 지금,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100년 전의 이 땅은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힘이 들었다는 말로 부족할 것이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겠다면 죽어야 했고 모든 자존심과 정체성과 내 가족과 친구를 갈아치워야만 간신히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갈아치우고 난 자리에, 과연 그 삶에 어떤 영원한 것이 남아 있었겠는가.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이다.
죽거나, 혹은 인간의 껍데기만 남은 삶.
100년 전의 삶은 그런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이 잘나고 특별해서 그런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삶을 필사적으로 살아냈다. 심지어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만도 부족하기 그지없는 중에 감자 한 알, 돈 한 푼으로도 누군가를 도왔고 그마저 없다면 자신의 생명을 갈아 넣어 몸으로 일하며 도왔다.
누군가는 자신의 몸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총탄을 막았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한을 대신 풀기 위해 원수 앞에 나서서 그 원수와 함께 자신의 남아있는 삶을 끝냈다.
누군가는 개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그 죽음과 고통들 앞에서 내가 느끼는 일상의 권태와 고통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순국선열들과, 그렇게 불리지 않고 그 이름이 잊혔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고와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이야기이다.
내가 누리는 이 나라, 자유, 선택 그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의 몫과 그 삶을 강탈하여 만든 것이라면.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한다.
주말과 맞닿은 광복절 들뜬 여름의 밤공기 속을 자신의 의지와 선택대로 걷고 있는 번화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쓴다.
광복절(光復節), 빛이 회복된 날. 혹은 빛이 돌아온 날.
그전에 새까만 어둠을 살아내야 했던 조상들과 순국선열들도 이 거리에 이 밤에 이 계절을 즐겨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와 같이.
이 마음을 1년 내내 가질 수 없더라도 오늘과 같이, 되돌려 떠올릴 수 있는 날로써 영원히 잊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죽음에 대한 보답이 조금이라도 될 것이라 믿는다. 그보다 더한 보답은 건네받은 이 삶을 그들처럼 필사적으로 사는 것이라 믿는다.
우리 삶에도 가끔 어둠과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바쁘게, 열심히, 웃으면서 살면 된다. 그 결과가 내 기대에 미치지 않아도 아예 생각지 못한 방향이 되어버린다 해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시간은, 순국선열들처럼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바로 돌아가신 그분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들이다.
그 모든 희생에 마음을 담아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