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감자(HSP)가 살아가는 법

우리는 잘못된 것이 없다

by 김효민






최근에 보이게 된 용어 중에 '초민감자(HSP:Highly Sensitive Person)'가 있다. 우연히 마주친 단어에서 나는 각성하듯이 단번에 그게 나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곧장 올바른 확신을 위해 관련 서적을 두 세권 정도 읽었다.


읽을수록 그 안에서 나를 찾아냈고 그리고 현재, 그것은 나를 이루는 하나의 퍼즐조각이 되어있다. 길 가다 갑자기 금은보화를 줍게 된 것처럼 지나가며 보인 단어에서 나를 찾게 될 줄이야.


내가 읽은 것 중에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라는 책에서 저자 '주디스 올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초민감자의 신경계는 극도로 예민합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외부 자극을 차단하는 필터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주변에 흐르는 긍정과 고통의 에너지를 무차별적으로 흡수합니다."


현재 초민감자는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최대 20%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래는 주디스 올로프가 제시한 초민감자 자가 체크리스트이다.

● 자주 압박감을 느끼고 불안해지는가?

● 말싸움이나 고함을 들으면 불편한가?

● 무리에 섞이지 못한다는 기분이 자주 드는가?

● 군중 속에 있으면 녹초가 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기운을 차려야 하는가?

● 소음이나 불쾌한 냄새,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을 견디기 힘든가?

● 어디를 가든 일찍 나오고 싶을 경우를 대비해 본인의 차를 가져가는 편인가?(혹은 그런 수단을 준비하는가?)

● 스트레스를 받으면 과식을 하는가?

● 깜짝깜짝 잘 놀라는가?

● 사회적 고립을 택하는 편인가?

●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나 감정, 신체 증상을 흡수하는가?

● 멀티태스킹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편한가?

● 자연 속에서 재충전을 즐기는가?

● 어려운 사람이나 에너지 뱀파이어(나의 에너지를 빨아먹는 사람)를 상대한 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 대도시보다 소도시나 시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 여럿이 모이는 것보다 일대일이나 적은 인원과 교류하는 게 좋은가?


이상이 내가 해당하는 초민감자의 특성들이다. 총 19개 항목 중 15개, '초민감자, 이거 내 얘기인가?' 하며 다시 한번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초민감자들이 스스로의 감각과 감정이 다른 사람에 비해 아주 민감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한다. 그 결과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감정을 비교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부정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안 괜찮은데,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한다면,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이렇게 예민하게 굴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더 드물 것이라 확신한다. 오랜 진리,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많은 연구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앞선 근현대사회는 이성과 논리, 합리성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러한 흐름 끝에 현재에 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감각, 감정이 예민하다는 것은 파도를 잘못 읽는 서퍼와 같았다. 익사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몇 배나 몇 십배나 남들보다 더 물에 빠져야만 했다.


바로 내가 그랬다. 초민감자인 나는 여러 의미로 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버거웠다.(외국이었던들 다르지 않았을 거다.)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심지어 내 가족들, 살아오는 내내 어디에서든지 나에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주길 원했다.

감각이 예민하고 감정이 과민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받아들여지려면 그들과 싸워 이기든가, 나를 거짓으로 꾸미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아닌 내가 되어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는 잠깐의 소속감을 느끼고 곧 식어버릴 온기에 잠시동안 발끝을 녹였다.

그리고는 끝내 내 거짓말이 들통나던지, 또는 내가 쓴 그 가면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져 결국은 내던지고 도망쳤다.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그들이 편협하고 매정한 탓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가 그랬던 거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닫기 전의 나는 그들이 잘못되었거나, 내가 잘못되었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한 사람은 남들에게 잘 맞추며 누구나 납득할만한 숫자로 돈이나 명예를 쌓고 그것을 자랑해야 하는데

감정이 예민해서는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향해 달릴 때 자주 멈추거나 속도가 느리거나 속도를 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 고속도로에 올라타 달리는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종인듯한 거리감을 항상 느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짐을 나는 등에 메고서도 그들과 똑같은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어렵지 않게 다 하는 일이라는데, 나는 이상하게 너무나 숨이 찼다.


감각은 오감을 말한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그리고 감정, 다 표현하기도 힘든 인간의 무수한 생각과 마음들.

초민감자는 그것들이 전부 과민하게, 필요한 수준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무엇이든 부족하거나 과한 것은 좋지 않듯이 감각과 감정을 느끼는 것도 적당한 수준이 좋다.


알고는 있지만 내 감정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괴로웠다. 나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까지 가슴 아프거나 흥분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도 정말, 그들처럼 생각하고 싶은데.


하지만 한 번 상처받은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미친 것처럼 한 번쯤은 친구들과 길거리를 뒹굴면서 놀 수도 있었을 텐데 뭔지 모를 두려움에 몸이 굳어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했다.

작은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날을 세웠다. 타인의 악의 없는 실수라도 내가 불편해졌듯, 내가 타인에게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많은 상황을 남들보다 먼저 눈치채고 행동하지만 결과는 항상 해피엔딩이 아니라 나를 소진시키거나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기도 했다.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남들보다 배로 느낀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더 크다.

생각이 비관적인 쪽으로 너무 쉽게 흐른다.

스트레스를 풀기 어렵다.

다른 사람이 손을 어디에 두든, 언제 어떻게 한숨을 쉬고, 시선을 어디에 두든 그 감정이 말없이도 느껴진다. 표현하지 않은 감정까지 알아버리는 건 그에게도 나에게도 고통이었다.


하지만 감정은 내가 느끼는 것, 즉 나 혼자만 괴로운 일이라 내가 힘든 이유도 나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것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던 자기부정의 시작이었다.


어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고서도 십몇 년간, 초민감자라는 단어를 알기 전까지는 내 감정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게 아니라 숨기려는 생각만 했다.


야생마에게 고삐를 묶고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려놓고, 마구간에 넣어서는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만 했었다.

'묶어놓았으니 이제 괜찮겠지.' 하지만 잘못 생각했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은 맑게 자정 되지 못했고, 쌓이는 마음 한 구석은 홀로 썩어갔다.


이제 초민감자라는 단어를 알고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다만 섬세를 넘어 예민한 사람이고 나의 감정의 그릇은 웅덩이가 아니라 심해였을 뿐.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없다. 수영하는 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내 머리카락이 곱슬이고 내 눈에 속쌍꺼풀이 없는 것처럼. 내 피부가 쿨톤인 것을 알고 화장품 색을 바꾸는 것처럼.


원인이 내 행동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이런 특징을 가진 인간이 있어서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은 변했다.


나는 내 행동 또는 내가 느끼는 것을 잘못되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옳고 그 감정에 따르는 나의 행동도 옳았다.

그걸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그렇지 않았고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그들끼리 부딪혀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의 하나였을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그 순간 동전이 뒤집히듯 나의 단점들은 있는 그대로 나의 장점이 되었다.


기억력이 좋다.

남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다.

섬세하게 배려하고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적다.

많은 상황을 남들보다 먼저 눈치채고 행동한다.

똑같이 배워도 느끼고 깨닫는 것이 크다.

미래에 대한 대비에 철저하고 그게 숨 쉬듯이 자연스럽다.

사소한 행복감도 잘 느낄 수 있다.

내 환경을 내가 바꿀 수 있다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안식처를 만들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손을 어디에 두든, 언제 어떻게 한숨을 쉬고, 시선을 어디에 두든 그 감정이 말없이도 느껴진다. 표현하지 않은 감정까지 알아버리는 건 그에게도 나에게도 깊은 유대가 될 수 있었다.


나 스스로 나라는 사람 자체를 그대로,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인정해 주는 것.

멋진 모습, 못난 모습까지 전부 받아들여주는 것.

나의 어려움을 알고 그럼에도 이 세상에 살아가고자 함께 방법을 궁리해 주는 것.

실패도 성공도 기억하고 다시 도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즉,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하는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놀라운 깨달음이자 변화였고 아무것도 더 필요한 것 없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 행복했다.

그 세계 밖에서 어떤 뾰족한 기둥이 나를 겨누고 다가와도 그때만 힘들 뿐 어려운 때는 시간의 힘으로 반드시 지나가고 나는 다시 나의 안전하고 다정한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변화는,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만으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 10년 후, 50년 후의 나도 다른 사람일 테니 내 삶이 끝날 때까지 나는 새로운 나를 계속 알아가게 될 것이다.

끝이 나지 않는 문답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풀면 풀수록 다른 정답이 나오는 문제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설레서, 너무나도 기대가 되어서,

오늘도 기꺼이 그 길에 오른다. 나 자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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