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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Mar 05. 2021

말하라, 그리고 보여줘라

발설의 기술 1

글쓰기 조언 중에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라는 게 있습니다. 글을 쓸 때 단지 독자에게 설명하지만 말고 독자 스스로 인물이나 장면,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도록 묘사하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설명해도 되겠지만 한 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안다 형, 그러니까 뭐든 다 안다고 해서 안다 형이라고 불리는 형이 볼일이 있어 근처에 들렀다면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형은 젊은 시절 술 마실 때면 안주도 마다하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반주로만 마신다며 감자탕에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나는 잔만 받고 마시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글쓰기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물었다. “글쓰기 조언에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게 있잖아. 보여준다는 게 어떤 거야?”


Erica Li on unsplash


형은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 반주로 낮술까지 마시니까 기분이 좋은지 막걸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보여준다는 건 말이지... 통감자를 건져 먹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는 거야. 득아, 너 류시화라는 분 알지? 예전에 ‘시운동’ 동인도 하고 그랬는데. 아무튼 그 이가 언젠가 페북에 쓴 글 중에 '누구도 우연히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라는 글이 있었다. 스무 문단쯤 되는 제법 긴 글이었는데 이런 문단이 있었지.


"대학 졸업 후 중학교 임시 교사가 된 나는 시를 써야 할 시간에 자음접변과 구개음화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 괴로웠다. 선배 교사와 저녁을 먹으며 고뇌를 말했더니, 그는 '석 달만 지나면 그런 고민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감자탕 속 통감자를 건져 먹으며 말했다. 내게는 그 말이 '석 달 후에는 고민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서운 의미로 들려 그다음 날 사표를 내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왔다. 한 달도 못 채웠기 때문에 월급은 사양했다. 더 늦기 전에 그 선배 교사가 내 삶의 방향을 튼 것이다."


선배 교사는 "감자탕 속 통감자를 건져 먹으며" 말했고, 나는 다음 날 사표를 내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왔지. 저 표현들이 없어도 선배 교사는 내게 조언을 할 수 있고, 나는 학교에 사표를 낼 수 있지만 저렇게 써 놓으니 얼마나 생생하냐? 선배 교사의 표정이며 말투가 보이고 사표를 낸 나의 표정과 걸음이 보이잖아. 보여준다는 건 바로 그런 걸 말하는 거야.” 형은 목젖을 아래위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형은 막걸리 두 통을 혼자서 다 비우고도 여전히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나는 오후 회의 때문에 바로 일어서야 했다. 계산대 앞에서 음식값을 치르고 감자탕집 가게문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라는 글쓰기 조언은 물론 마땅하고 좋은 말씀이지요. 그러나 그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되는 말이지 쓰고 싶어도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아직 첫 문장도 시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만드는 말일 수 있습니다. 저는 저 말을 이렇게 살짝 바꾸고 싶습니다. "말하라. 그리고 보여줘라."


아무래도 글쓰기보다는 말하기가 그나마 쉬우니까요. 우선 말로 해보는 것이지요. 누가 곁에 있으면 그에게 말하고 아무도 없으면 혼자라도 중얼중얼 말한 다음 그걸 그대로 글로 써보면 어떻게든 시작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조언은 누구보다 저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오늘도 글을 쓰지 못하는 제가 저에게 말해봅니다. “말하라. 그리고 보여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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