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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Mar 04. 2021

정답을 알려주고 치는 시험

체득의 기술

“다른 과목은 몰라도 체육만큼은 너희들 모두 만점 받아야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맡은 과목은 체육이었어요. 선생님은 운동이라면 다 잘했지만 특히 테니스를 잘하셨습니다. 이런저런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도 입상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언젠가 선생님 이사할 때 도와드리러 간 하숙집에서 트로피와 상장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던 무렵은 선생님들의 체벌이나 구타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시절이었어요. 교사나 학생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이 많이 부족하던 때였지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말하면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을 거칠게 대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제 기억으로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온화하고 반듯하고 소탈하고 그러면서도 조용하신 분이었어요.


선생님은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가냘프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체육 교사로서는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어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마치 부르스 리를 연상시킨다고 할까요? 근육에 낭비가 전혀 없는, 절제되고 균형 잡힌 몸이었어요. 첫 체육 시간, 운동장 한편에 모인 까까머리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Braden Collum on unsplash

“다른 과목은 몰라도 체육만큼은 너희들 모두 만점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는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담임이 체육 선생이니까요. 당연한 말씀 아닌가요. 그러나 선생님이 한 말씀은 달랐습니다. “무슨 과목이 가장 어려워? 영어? 수학? 국어? 그래 다들 국영수가 어렵다고들 하지. 그런데 만약 시험 치기 전에 미리 문제를 알려주고 치게 하면 국영수도 점수를 잘 받겠지? 게다가 정답까지 다 알려주면 너희들 모두 만점 받겠지?” 우리는 “네”하고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그래. 체육이 바로 그런 과목이야. 문제도 정답도 다 알려주거든. 백 미터 달리기는 몇 초 안에 들어오면 되고, 윗몸일으키기는 1분에 몇 회 이상 하면 되는지 미리 알려주고 시험을 쳐. 세상에 이보다 더 쉬운 시험이 어디 있겠냐? 그런데도 쉽지 않은 건, 다 알고 있는 답을 너희들 각자의 몸으로 써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그날 무슨 연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도 마치 음성지원을 받는 것처럼 생생합니다. 그것은 체육만이 아니라 인생 역시 그렇기 때문이겠죠. 우리가 사는 삶 역시 바르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답은 다 알지만 그렇게 잘 아는 답을 막상 자신의 삶으로 하루하루 써내기가 힘들다는 걸, 정답 비슷하게 흉내 내는 일조차 너무나 어렵다는 걸,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오답투성이의 생활을 쓰고 있다는 걸 살면서 절감했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겠죠. 과연 우리가 글 쓰는 법을 몰라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요? 소설가 이태준 선생의 저 유명한 말, 그러니까 “만만한 소재를 정하고, 오래 보고 고요히 생각하며, 꼭 맞는 표현을 찾아 쓰고, 다 쓴 다음에는 고치고 또 고치라”라는 말을 우리가 몰라서 글을 못 쓰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몰라서 못 쓰는 것 역시 아닐 거고요. 우리는 어떤 글이 좋은지 알고 어떻게 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글쓰기의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도 글쓰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역시 다 아는 답을 자신의 언어로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 써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써내는 글이 자기가 아는 글쓰기의 정답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는 걸,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걸 매번 절감하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글쓰기도 체육처럼, 삶처럼 수행이, 수련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몸에 익히는 체득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글쓰기는 결국 우리 삶을 우리의 손끝으로 쓰는 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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