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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단하는 킴제이 May 24. 2023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는 사람(1편 또 퇴사)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비로소 내가 길임을 깨달아 강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간다.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의심할 여지없이 그저 시원하게 나아가 헤엄친다.

혹시 혼자는 아닌지 이게 맞는지 다른 길도 어슬렁 거렸는데 이제는 외로울 겨를 없는 즐거운 노랫소리고 길이다.  

언젠가 한 번은 나의 일과 여행지를 돌이켜 본 적이 있다. 나는 왜 맨날 이렇게 끈질기게 한 가지를 못하고 또 새로운 걸 하려고 하는 걸까. 남들은 멋지게 직선의 길을 가는데 왜 나는 퐁당퐁당 저 멀리 있는 돌다리를 쳐다볼까. 한걸음에 닿지도 않아 애써 수영해서 가거나 물살에 휩쓸리다가 가까스로 다른 돌 잡아 올라탔다. 그런데 이제 다시 보니까 상관없다고 했던 점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큰 그림을 위해서는 밑그림을 더 크게 그려야 할지 모른다. 남들 색칠할 때 나는 도화지부터 만들었어야 했을지 모른다.  


수많은 점들이 별처럼 빛난다. 그 시간들을 다시 헤아려보며.. 다녔었던 회사에서의 에피소드



광고 에이전시에서는 밤 12시 전에 퇴근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다들 정직원이 되면 대표님과 같은 문신을 하고 싶어 했고 나는 밤 10시에만 퇴근해도 강남역 영어학원을 등록하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새벽 2-3시에 끝나서 아침 9시 출근이었는데 너무 괴로워서 지각이 일상이었다. 아니 잠을 못 자는데 어떻게 일을 하지. 늦었다고 걱정 어린 조언을 받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터키로 갔다. 엄마는 도망치는 거라고 걱정했지만 도망이 맞다. 지금 여기서 죽겠는데 어쩌겠냐. 터키 친구가 같이 일할 수 있는 디자인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갔다. 프로젝트 시작은 늦어지고 서로 돈은 없고 시간만 많아서 회사 로고를 만들고 프로필 사진도 찍었다. 밥은 사무실에서 해 먹었는데 점점 지겨워졌지만 서로의 불안함을 들춰내진 않았다. 3개월이 돼 가고 아무래도 취업비자로 연결하긴 어려울 것 같아 친구들이 다른 회사면접도 잡아주고 그랬다. 이럴 거면 한국에서 취업세팅을 다시 하고 오는 게 맞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내 생일에 친구들과 다같이 모여서 사진
할 일 없어서 프로필 사진 찍고 명함만들고 지나고 보니까 이게 다 브랜딩이었다

대학생 때 졸업전시로 광고 디자인을 둘이서 같이 한 게 있는데, 졸업하고 나서 공익광고의원회 공모전에 일반인 자격으로 작품을 냈더니 장려상을 탔다는 게 아닌가.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는 핑계가 되겠다 싶어서 나는 다시 도망쳤다. 비행기 날짜도 시상식 날에 딱 맞춰서 도착하자마자 미용실 가서 머리 감고 동생한테 옷 받아서 행사장으로 갔다. 스테이크도 먹고 무대에서 상도 받으니까 터키에서 또 잘 안되었다고 생각했던 일도 금세 잊혔다. 

부모님 댁으로 가서 밥 얻어먹으면서 지냈다. 휴학도 2년했던지라서 부모님이 걱정하셨지만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서울에서 글로벌 마케터 취업설명회가 있다고 해서 갔다. 엘지전자였고 터키지점도 있길래 거기서 정보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설명을 들으니 한국에서 1년-2년 정도 마케터 훈련을 시키고 해외로 보내준다고 했다. 한국시장이 가장 타사와 경쟁이 심하기에 여기서 집중도 있게 교육을 하면 어디든 나갈 수 있다고 했고 오늘 참여한 사람은 이력서점수 1점을 추가로 준다고 했다.  


터키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고 여기에 이력서 지원하고 터키로 가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어차피 여기 와서 같이 할 프로젝트가 없으니 콘텐츠기획하면 이메일로 보낼 테니 아이디어를 한 번씩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엘지전자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1차 서류합격을 했다. 동아리 오빠들이 나 같은 사람은 가면 안 된다고 했다. 가면 창의력이 죽어서 시체처럼 지낼 거라고 했는데 그 말에 이상한 오기가 생겨서 일단 되고 나면 결정하겠다고 했다. 왠지 터키에서 3개월 동안 브랜딩 작업을 해본 게 이력서에서 그럴싸해 보였을 것 같다. 거기 지내는 동안 엘지전자와 삼성전자 물품을 마트에서 파는 걸 봤는데 친구들에게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고 디스플레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적어서 냈었다.  

면접만 봐도 다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였고 이화여대 나온 친구는 학벌에서 꿀린다고 울었었다.

나랑 H는 딴 세계사람들이라며 둘이 엄청 친해졌다. 5번인가 면접을 보고 H에게 전화가 왔다. 


“너 붙었어!?!??! 야 나 이메일 왔는데 최종이야!!!!”

“야!! 너는 내가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전화해서 붙었다고 하면 어떻게 해!!! 야 축하해!!! 눈물 날 거 같아. 야!!! 나도 이메일 왔어! 클릭 못하겠어!!”

“해봐 빨리!!!” 


최종 합격을 했다. 학교 친구들은 엄청 신기해했다. 디자인 전공에 휴학하면서 마케팅 동아리에 들어갔었는데 그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회사 동기들과는 엄청나게 가까워졌다. 주말에 만나서 이태원에서 놀고 월요일에 출근했다. 서로 눈빛만 봐도 어떤 마음인 줄 알았어서 같이 여행도 자주 다녔다. 그래서 퇴사하기가 힘들었다. S는 신경안정제를 자기도 먹고 있다고 불안해하는 나를 위로해줬고 A는 고등학교도 부모님이 원하는 곳, 대학교도 취업도 부모가 그려준 곳으로 왔다고 했다. 이제야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도 되는 해방의 시간인데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괴로워했다. 회사에는 부장님들만 모인 팀이 있었다. 오 완전 실력자만 모였다 어떻게 부장님들만 모아서 프로젝트를 하냐 잘 될 수밖에 없다고 그 팀의 한 분에게 말했었다. 동기가 화장실로 나를 부르더니 저 긴 회사에서 알아서 나가라고 모아둔 팀이라고 했다. 자를 수가 없으니 저렇게 수치심을 줘서 나가게 유도한다고 했다. 마케팅 본부여서 지원을 했는데 몇 개월 뒤에 세일즈 본부로 바뀌었다. 숫자가 마케팅의 꽃이라고 했지만 모든 지역의 대리점 사장님을 관리하는 건 정답이 없었다. 옆 팀의 친구는 대리점 사장님들과 모여 체육대회를 했는데 화채 그릇에 소주를 부어서 손뼉 치며 주길래 안 마실 수가 없어서 먹고 울면서 전화를 했다.   


신입연봉은 높았고 우리는 소주 대신에 양주를 주문해서 먹었다. 현대카드 레드카드를 다들 발급받았는데 나는 쓰는 카드가 있다고 안 받았다. 차장님은 대한민국 3% 여자인데 명품을 왜 안 사냐고 했고 어떤 분은 9개월 만삭까지 이마트 지점과 싸워서 진열을 했다고 박수를 받았다.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전체 온라인 마케팅을 맡아서 했다. 온라인 판매점이 어떤 본부 소속인지 파악이 안 되었는데 팀장님이 그걸 네가 다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부산을 직접 가보든지라고 했다. 나는 3일 동안 지낼 짐을 싸가지고 출근해서 부산 어디서부터 가면 되냐고 물었고 부산에서 전주까지 들러 온라인 판매자들을 직접 만나 실제 수수료구조들과 연결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팀장님이 다른 실장님들에게 돌아가면서 한소리 들었다고 했다. 차장님도 진짜 킴제이가 가버릴 줄 몰랐다고 했다. 에이스가 가는 팀이라고 해서 배정돼서 좋았는데 실적도 안 좋고 모든 걸 다 알아서 해야 했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온라인 프로모션 기획, 전단지 디자인, 내가 집중으로 맡은 대리점 3개 담당에 매일매일 틀리는 실적관리에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빠르게 모든 업무를 맡아서 했던 게 큰 배움이다. 회식이 정말 많았다. 일주일에 3번은 술자리였는데 아무 생각 없이 회사 행사에서 맥주 마시기 대회를 1등해가지고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으로 마시고 다니까 다들 예쁘게 먹고 있었다..) 술 잘 마신다고 오해를 샀다. 순간의 승부욕이 이상한 꼬리표가 되었는데 덕분에 맛있는 것도 많이 얻어먹었지만 술이 정신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우리 팀은 실적이 안 좋다고 눈총을 많이 받았다. 회사 측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니까 쉽지 않았다. 냉장고든 티브이든 렌털 서비스를 해보기 위해서 정수기 시장부터 들어갔다. 아주 거칠었지만 프로젝트를 직접 해볼 수 있다는 게 큰 운이었다. 내가 지금 전국 렌털시장이 000억 규모라고 하면 그게 윗선까지 그대로 보고 되었다. 한 번은 렌털 사업을 불법적으로 이용해서 신용불량자에게 대출을 해주는 조폭 조직을 알게 되었다. 후배랑 현장을 잡으러 가기도 했다. 렌털 설치 장소가 모텔이었는데 그게 실제 설치가 되어있는지 파악을 했어야 했는데. 가보니까 정신병원과 감옥 콘셉트로 온갖 채찍질과 수갑이 있는 곳이었다. 후배는 한 조직원이랑 대화를 하다가 분위기가 험해져서 몰래 녹음했다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면서 둘이 이거 2580 같다며 즐겼던 기억도 있다. 


회사 개인정보 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걸 부산 판매자에게 들어서 (출장 가서 직접 만나서 시장 파악했는데 본사에서 이렇게 온건 처음이라며 부산 드라이브도 시켜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셨다) 팀에 보고를 했더니 회사에서 10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신문사에 알렸으면 더 받았겠지? 1000만 원 준다고 들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패드 받은 걸로 끝났다) CFO 와의 점심식사도 잡혔는데 약속 이틀 전에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지 이메일이 왔었다. 팀장님은 내가 말실수를 할까 봐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다. CFO가 19층에는 자주 올라오냐 이런 걸 물었는데 거기 잘 생긴 분들이 있어서 종종 구경 간다고 했다가 팀장님이 우리정은씨가 디자인 전공을 했어서 인지 특이하다고 애써 설명해 줬다. 창의력이 있는 인재라고 칭찬으로 내 입막음을 했고 나는 CFO에게 소개팅 시켜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왔다. 

부사장과의 점심식사는 뭔가 잘 못 되었다 싶을 정도로 철저했다. 전날 만나서 서로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리허설을 하고 자리까지 짰다. 다들 그 자리에서 말실수하면 큰 일 난다는 분위기였다. 나는 우리가 차까지 타고 나가서 한식집에서 문어요리인가? 그걸 먹는다고 해서 말 안 하고 밥만 먹겠다고 했다. 동기들은 그날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왔고 다들 부사장님 옆에 안 앉으려고 뒤로 물러서다가 내가 앉게 되었다. 생각보다 편한 자리였고 맛있게 먹었는데 그 자리가 모두녹음되고 있었다. 갑자기 부사장님이 지시하는 프로젝트가 생길 수 있으니 바로 팔로업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동기들은 준비했던 질문들을 했다. 회사의 미래 비전을 묻기도 했고 소속팀의 실적 데이터를 달달달 외워서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밥만 먹겠다고 했다가 옆자리에 앉아버려서 부사장님은 문어를 어떻게 먹는 걸 좋아하냐. 이딴 이야기만 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점심시간에 김치찌개 먹으러 간다길래 저는 옷에 김치찌개 냄새 베기 싫고 돈가스가 땡겨서 돈가스 먹고 온다고 했다가 차장님이 오후에 나를 불렀다. 팀 식사는 팀의 교류고 업무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웬만하면 팀장님이 먹자는 거 먹자고 하셨다. 아니 이게 뭔가 당황했다가 이해가 되기도 해서 그럼 진짜 먹기 싫은 건 안 먹고 싶으니까 그때는 제가 약속 있다고 빠질 테니 차장님께서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 팀은 실적 때문에 욕을 많이 먹어서 우리끼리라도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팀장님, 차장님 3명에 신입사원 나 혼자였는데 진짜 많이 챙겨주셨다. 서로 옷 잘 입는 이야기 했다가 한 달에 한 번씩은 패션데이를 만들어서 우리 5명이서 멋지게 입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갔다. 차장님이랑 둘이 회사 행사에서 당돌한 여자를 불렀던 기억도 있다. 내가 신나게 부르면 차장님이 카메라맨처럼 나를 찍는 시늉을 했다.  

동기들. 주말에는 1박2일 여행다니고 평일에는 --씨 존댓말 쓰는게 재미졌다.

그래도 내게 맞지 않는 곳에서 일시적인 즐거움도 점점 의미를 잃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숨 쉬는 게 어려웠다. 한 번의 회사에 못 가겠다 싶어서 정신병원이라도 가야 하나 길을 나섰다가 무서워서 아래층의 내과를 갔다. 선생님이 어디가 불편하냐고 묻자마자 엉엉 울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재현오빠는 그러게 네가 거기 가면 너의 영혼이 죽을 거라고 했잖아 하면서 웃었다. 퇴사를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가족들이 이걸 포기하면 다른 일도 또 쉽게 포기할 거라고 해서 겁이 났다. 그러다가 대자연의 날 호르몬 폭발로 퇴사 통보를 했다. 운영팀과 상담에서 내가 이번에 S를 받을 건데 퇴사를 하면 어쩌냐고 걱정해 줬다. 임문수 선생님한테도 퇴사할 거라고 하니까 그래도 최고는 한번 찍고 오라고 하셨고 바로 S등급 받았는데 퇴사 처리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럼 그만해도 되겠다고 응원해 주셨다.  


우리 팀에 눈만 흘기던 실장님과의 면담을 했다. 내가 실적관리하는데 엑셀을 맨날 틀려가지고 많이 혼났었는데 나는 결국 퇴사한다. 터키 가려고 여기 왔는데 회사 전략이 바뀌어서 7년 뒤에 간다고 들었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해외 업무를 할 수 있는 좋지 않냐고 묻기에 7년 뒤면 30년 중반인데 그때는 내가 뭘 원하는지 해외일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 모르니 지금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냥 지금 바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실장님은 가만히 계시다가 부럽다고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고 될 사람이니까 지금 놓치지 말라고 하셨다. 아쉬운 건 회사지만 회사는 어차피 회사니 지금 이 시간은 놓치지 말라고 하셨다. 감사해서 눈물이 마구 났다. 처음으로 어른에게 괜찮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일을 마무리할 때는 한참 우리 건물에서 미생 드라마를 찍을 때였다. 동기들은 더할 나위 없었다며 드라마 대사를 쓰며 인사해 줬고 터키를 떠나는 날에는 다들 모여서 엄청나게 큰 파티도 해주었다.  

같이 입사한 지 거의 9년이 지나간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이야기해보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서 대화가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지만 회사 다닐 때의 우리의 끈끈한 추억이 너무나 귀엽고 애틋해서 더 바라지 않고 감사할 뿐이다.  

터키로 들어가 한국에 시상식에 맞춰서 오고 다시 돌아갈 계획으로 들어봤던 마케팅 전략 설명회. 그렇게 엘지전자에서 일을 해보게 되었다. 생각도 못했던 대기업이었다. 목표를 잡고 진행된 일은 없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큰 기회들이 내게 왔다. 직업도 다르고 커리어도 꼬이는 일인데 이래도 되냐고걱정해주는 목소리들에 흔들렸다. 이러다가 또 다른 일 한다고 포기하겠지 왜 꾸준히 못할까 심난하기만 했지 나는 이게 내 인생의 큰 메세지임을 알지 못했다. 자유를 찾아 몸과 마음이 YES라고 할 때 뭐든 할 수 있는 큰 힘이 내 운명인지 몰랐다. 불안해 할게 아니라 즐기라는 신호임을 몇 년이 지나서야 천천히알게 되었다. 



(2편에서는 엘지전자를 떠나 태국으로 떠났던 이야기, 그때 겪은 크나큰 사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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