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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단하는 킴제이 May 25. 2023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는 사람(2편, 남편)

아 퇴사하기 두 달 전에 제리라는 친구를 처음 만났다. 어떻게 만났냐면 대학 동창 기현이 사촌동생이 교포인데 영어로 같이 이야기할 친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나와 고은이를 초대했다. 그렇게 죤(John)을 만나 종종 카페도 가고 그랬다. 어느 날 죤이 지금 세계여행을 하는 친구가 한국에 오는데 킴제이가 서울구경을 시켜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만났다 죤이 내 어깨뒤로 헤이! 하고 부르길래 돌아보니까 노란 재킷을 입은 갈색머리 일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썹도 다듬어져 있었고 활짝 웃는 게 멋졌다.  


세계여행 중인데 일본에서 헤어숍을 갔더니 이렇게 눈썹도 깎아줘서 일본에서 다들 자기한테 일본어로 말을 걸어서 재밌었다고 했다. 북촌마을 주변에 갈식당을 찾아뒀는데 길을 잃어서 몇번이고 헤매이다가 그냥 역 근처에 있었던 술집에 갔다. 오징어 볶음도 먹고 전도 먹고 2차는 어딜가지 눈을 굴리다가 2층 호프집이 보여서 들어가자고 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길래 여기가 진짜 미국에서 못 보는 한국이라고 소개해줬다.  

세계여행을 한다는 게 매력적이라 어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계속 물었다. 회사도 집도 차도 정리하고 떠났다고 했다. 아 멋있다. 어떻게 그렇게 떠나버릴 수 있냐고 하니까 자기는 계획적인 사람이라서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에 먹을 메뉴까지 생각하는데 지내다 보니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무계획을 계획 삼아 떠났다고 했다. 킴제이는 뭘 하고 싶냐길래 터키에서 일하고 싶어서 지금 회사 들어갔고 원래 2-3년 뒤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이제 7년 뒤로 바뀌어서 그냥 혼자서 가버릴까 싶다고 했다.  


“그럼 그냥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어? 그게 쉽지 않지.. 그리고 좀만 기다리면 인센티브랑 설날 보너스가 나와서 큰돈이라..”

“얼만데?”

“아마 다 받으면 700만 원 되지 않을까?”

“아 그럼 킴제이는 지금 700만 원이 기다릴 만큼 꼭 중요한 돈이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리 여행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로 덮어뒀던 저 구석 내가 살고 싶은 삶의 소리가 가슴속에서 다시 들썩였다. 제리는 자기는 원하는 게 없어서 고민인데 킴제이는 원하는 게 있는데 안 하고 있는 게 인상 깊다고 했다. 마음의 소리가 머리를 빼꼼 내밀어본다. 스스로 핑계를 만들면서 남 탓을 할 수가 없다며 12월 말 퇴사를 했다. 앞으로 올 29살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제리와 교수님, 친구들과 여수와 제주도 여행을 갔다 

제주도에서는 게스트하우스를 갔는데 다들 술을 마시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회식하듯 노는 문화가 신기했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2차 호프집을 갔다.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묻길래 터키를 갈 건데 그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싶다고 했다. 


뭘 하고 싶었냐고 물었나 어떤 질문이었는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랑 동남아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이제 헤어져서 못 간다. 그게 아쉽다라고 답했다.  다들 취해서인지 갑자기 그럼 다 같이 가자며 흥분했다. 한 명은 아직 해외여행 가본 적이 없는데 킴제이랑 제리형이랑 같이 가면 믿고 갈 수 있겠다고 했다. 다음 날 술에 깨서 말짱 재져도 가고 싶어서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태국으로 떠났다. 


제리가 제주도 구경이랑 서울 구경 잘 시켜줘서 고맙다며 자기가 태국을 2번 갔는데 좋았다며 태국은 잘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다. 아니 퇴사를 지르자 마자 이렇게 바로 여행할 수 있다고? 퇴사하면 못 받겠다 싶었던 인센티브도 입금되었다. 아쉬움 없이 S등급에서 다시 제외되어도 퇴사한다고 했는데 잘 적용돼서 꽤 큰돈이 들어왔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여행을 간다는 것이 새로운 도전이라 어색했지만 지금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10일 정도 태국을 같이 여행하고 제리는 호주로 나는 네팔로 그리고 정호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방콕에서 처음 먹는 고수 음식이 안 맞았지만 3일 정도 지나니까 입에 맞아 찾아먹었다. 끄라비라는 도시에는 바다가 있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물가가 저렴해서 신나게 놀아도 몇 만 원 안 나오는 게 꿈과 향락의 도시다. 끄라비에서 수영도 하고 오토바이를 빌려서 다운 타운과 떨어진 곳을 구경해 보자고 했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푸르른 자연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휘리릭잠겼다. 


몇 년 동안 일하며 잔뜩 몸에 낀 긴장이 풀린다. 혼자서는 위험해서 못 오겠다 싶었던 곳에 이렇게 남정네들과 오다니 든든하다. 엄마도 위험하지 않겠다며 잘 되었다고 즐기고 오라고 했다.

오토바이를 2대를 빌려서 제리 하나 나 하나 운전했다. 내 뒤에 정호를 태웠다. 우연히 스님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원숭이도 보고 오후 4 시즌 되어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제리가 먼저 가고 뒤따라 갔는데 천천히 운전하느라 제리와 간격이 멀어졌다. 그러다 다리 위에서 제리가 손짓을 하는게 보였다. 풍경이 좋다고 구경하자는 손짓이었는데 브레이크를 밟을 때를 놓쳐서 그냥 갈게!! 하고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오토바이 운전을 한다는 게 신났다. 이렇게 앞자리에 앉아 자연을 가르며 바람을 만끽하다니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갔다. 이제야 그간의 긴장이 풀린다. 그러다 몇 번이고 백미러를 쳐다보는데 어? 제리가 안 따라온다. 바이크를 멈춰서 노래 한곡을 크게 불렀는데도 제리가 오지 않았다. 길을 잘 못 들었나 찾으러 가야겠다고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한참을 가도 없다. 갈림길이 없는데 어디 갔나 살펴보는데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있고 등에 긴장이 바짝 선다. 가까이 가니 가만히 앉아 있는 제리 등이 보였다.   


“Hey, Are you okay? We were waiting..” 

앉은 채 나를 바라보는 제리 얼굴이 하얗다.

“제리야 오토바이는 어디에 있어?”


제리가 손으로 가리킨 자리에는 바이크가 없었다. 좀 더 걸어가니 저 고랑에 바이크가 빠져있었고 다시 보니 제리 무릎과 발가락에는 깊은 상처들이 있었다. 사람의 뼈를 처음 보았다. 뽀얗고 하얘서 아찔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경찰과 119에 신고를 했다고 했다. 생수를 가져와서 상처를 씻어주는 분들 도계셨다. 무릎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려고 구급차가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캄캄해졌다. 제리에게  쇼크가 와서 온몸을 떨었다. 무서워서 제리를 안아주니까 제리가 숨을 못 쉬겠다고 해서 떨어져 있었다. 


구급차가 왔는데 회색 봉고차에 의자를 다 뜯어낸 빈 차였다. 일단 제리를 눕히고 나는 병원일을 처리하고 정호에겐 경찰이오면 바이크를 수습해 달라고 했다. 정호는 영어에 겁이 많았고 우리가 다시 어떻게 만나야할지 몰랐지만 일단 정신 바짝차리고 수습을 해야했다. 

“킴제이 미안. 나는 이제 여행을 끝까지 못할거 같아.구경 더 시켜주고 싶었는데 못해서 미안해” 


병원에 도착해서는 바로 응급처치가 진행되었다. 구멍이난 무릎에 솜을 짚은 핀셋이 깊게 들어갔다. 온 다리에서 피가 흘렀고 의사 선생님은 무릎상처는 오염이 되어 있을 수 있어서 바로 수술은 못하고 종아리 피부는 많이 벗겨져서 피부이식을 해야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질질 흐르는 피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집중해서 서류를 처리하고 1인실 예약을 했다. 한밤 중이 되어서야 정호가 연락이 왔다. 마을사람들이 이제 불이 꺼지면 동물들이 나타나서 위험하다고 떠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일단 바이크 타고 나왔다고 했다. 정신없는 얼굴에 혼이 나갔었다.  


혹시 외국에서 잘 못 되진 않을까 꼼꼼하게 병원서류를 체크했는데 1인실이 지금은 불가하다고 했다. 병원을 옮기기엔 늦은 시간이라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하니까 새로 지은 응급실이 있는데 거기서 오늘은 3명이 다 같이 자면 어떻겠냐고 했다. 우리 숙소까지 챙겨주는 간호사 분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하루 이틀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행히 제리 무릎 봉합 1차는 진행되었고 종아리는 일단 피부이식 하기 전에 경과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바이크가 모래길에서 미끄러졌고 제리가 오토바이랑 같이 끌려갔다고 했다. 이러면 죽겠다 싶어서 땅을 짚고 몸을 날려 바이크에서 떨어져 나왔는데 영화에서 카메라가 나뒹굴면 이런 연출이 될까 생각하다고 했다. 정호의 여행기간은 짧았기에 나랑 정호가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음식을 사서 병원으로 왔다. 제리는 병원에서 인기가 많아서 사진도 많이 찍히고 먹을 것도 많이 받았다. 점점 마음이 안정될 때 즈음 아! 이제 여행을 어떻게 하지 싶었다. 


정호는 취업준비를 위해서 떠나야 한다고 했고 나 혼자 남는데 잘 모르는 제리라는 친구를 도와주기엔 나의 여행도 남아있고 떠나기엔 제리가 걷지를 못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말했다 


“킴제이, 네가 미국에서 사고 났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잖아. 다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이번에 제리라는 친구가 혼자 지낼 수 있을 때까지 네가 도와주면 어때? 그걸 베풀 때가 되었나봐” 


모든 일은 우연인척 하고 온다. 마음을 열어 여행을 했더니 정신 못 차릴 일들이 쏟아진다. 난 태국도 네팔도 터키도 가야하는데.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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