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기 #001
"You never win with violence. You only win when you maintain your dignity." - Don Shirley
맨 처음 <그린북>을 접했던 건 모 멀티플렉스의 기획전에서였다. 그 기획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유일한 미개봉작이었던 이 영화와 <가버나움>이었는데, 그중 이 영화에서 비고 모텐슨과 마허샬라 알리라는 두 쟁쟁한 배우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확신에 가득 찼다.
아, 이 영화는 재미있겠다.
물론 플롯 자체가 흥미로운 영화는 절대 아니었다. 배경도, 성격도, 그 무엇 하나 같을 것 없는 두 주인공이 엎치락뒤치락 각종 사건 사고는 다 겪으며 우정을 키워 나가는 이야기는 이미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언터쳐블 : 1%의 우정>에서도 다루었던 소재이며, 후자는 할리우드 리메이크판도 존재한다 (원작은 흥행 기록이며 수상 내역이며 아주 휩쓸고 다녔는데, 리메이크 판은 비교적 임팩트가 덜 했던 모양이긴 하다). 그 외에도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영화'는 셀 수 없이 많고,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소개도 그렇게 새롭게 보이진 않는다. 다만 좀 이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감독인데, 그린북을 맡은 감독은 바로 피터 패럴리라는 인물이다. 동생 바비 패럴리와 함께 패럴리 형제로 유명한 이 감독은 사실 얼핏 보기에 인종차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룰만한 감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린북 이전 그의 이름은 사실 원초적인 코미디, 한 발 더 나아가서 일각의 표현을 빌리면 저속하고 교양 없는 코미디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도 유명한 대표작을 꼽으라면 <덤 앤 더머>,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그리고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정도. 그런 감독이 인종차별을 다루다니, 뭔가 흥미로움과 동시에 상당히 불안하지 않은가.
1월 7일, 즉 한국 정식 개봉 불과 이틀 전에 이뤄 낸 쾌거 (그리고 필자가 시사회로 이 영화를 만난 날이기도 하다). 각본상, 남우조연상, 그리고 작품상(뮤지컬 코미디 부문) 총 3개의 상을 휩쓸었다. 이쯤 되면 이제 정말 영화가 궁금해 질 것이다.
비고 모텐슨이 연기하는 토니 발레롱가, 일명 떠벌이 토니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서, 클럽 코파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던 중 터뜨린 사고로 인해 정직 처분을 받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러던 중 마허샬라 알리가 연기하는 돈 셜리 박사의 남부 투어 로드매니저 겸 보디가드 일을 제안받게 되고, 당장 가족의 생게를 걱정해야 했던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지난 몇십 년간, 인종차별을 소재로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는 '인종 간의 대립구도'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최근작을 예시로 들자면 겟 아웃이 어마 무시하게 그랬고, 여기에 성별 간의 대립구도 및 고정관념 뒤집기를 추가한 히든 피겨스가 그랬으며, 헬프, 말콤 X, 레이 등이 그래 왔다. 이것이 타 작품과 그린북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그래서 그린북이 그렇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나온 피터 패럴리 감독은 본인 대표작들의 특성을 한가득 살려, 그린북을 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영화가 선보인 팽팽한 대립구도와 고정관념 뒤집기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대신,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를 통해 탄생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통해 조금 더 간단하고, 인간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포스터의 말을 빌리자면, 두 남자가 사는 두 개의 세상은 사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세상이란 것. 정제되지 않고 직관적인 일명 '저속한 코미디' 특화형 감독 본인의 스타일이 빛을 발한 케이스가 아닐까. 이 주제를 다룰 때 이 이상 단순하고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니까.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된 '그린북'은 당시 흑인들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레스토랑과 호텔들을 모아놓은 여행 책자의 이름이었다. 단순한 입장 거부를 넘어 언어폭력,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당할 수 있는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책자였으며, 영화 속에선 이들이 길 위에서 육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을 알려주는 말 그대로의 '가이드북'과 같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돈 셜리와 같은 이들에게는 선을 긋고, 발목을 잡는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은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돈 셜리라는 캐릭터의 배경, 감정 변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법, 그리고 선 밖을 향한 갈망에 주목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의미 있게 즐길 수 있는 포인트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 지점은 비단 인종차별만이 아닌 모든 차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덤으로 마허샬라 알리 배우의 연기는 정말 탁월하다.
지난 월요일 시사회를 갔다 온 후 바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 영화 <그린북>은 1월 9일, 지난 수요일 정식 개봉했다. 어서 빨리 영화관으로 출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