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
A사의 사회부 기자 S를 만났다.
S는 육아를 위해 휴직 중이다. 휴직할 때의 소속이 사회부였다. 그렇다고 굳이 '사회부'라고 한건 아니다. '한 번 사회부는 영원한 사회부' 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해선 소속이 바뀌지 않는다. 한 분야를 십 년 넘게 취재할 수 있는 일본 기자들을 보며 가끔 부럽다는 생각도 한다. 이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래 두 가지 정도이다.
첫 번째, 입사 후 거의 곧바로 지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지역 근무지는 홋카이도가 될 수도 있고, 오키나와가 될 수도 있다. 운 좋게(?) 두 곳 다일 수도 있다. A는 나가노와 와카야마였다. 나중에 또 가야 한다.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당연한 거다. 적어도 내가 만난 일본의 기자들은 그 경험과 제도에 대해 '좋다'라고 평가했다. 지방자치도는 더 높고, 수도권 집중 현상은 '그나마' 덜한 일본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좋고 나쁜 모든 것의 밀집도가 도쿄는 서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두 번째, '한 우물'만 팔 수 있다. 이건 큰 장점이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한국의 언론사는 보통 1~2년이면 출입처를 바꾼다(출입처란 표현은 수동적인 어감이 있고, '받아쓰기'나 '베껴쓰기'의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국과 일본의 취재 시스템에 잘 맞는 표현이란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보통 한국의 언론사 소속 기자들은 좀 적응할만하면 취재 분야도 만나는 사람도 새롭게 바뀐다. 내가 가진 '전문성'이 입사의 조건으로 '00전문기자'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인정받는 게 아니라면 회사가 무언가를 해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문성이 갖고 싶으면 틈나는 대로 알아서 잘 길러야 한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는 한 우물만 파볼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기회는 주어진다(우물을 잘 파도록 두지는 않는 게 함정). 사회면 사회, 정치면 정치, 그 분야를 취재하는 게 내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해 볼 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긴 호흡으로 취재원을 관리하며 내가 맡은 기관을 파악을 넘어 '장악(아니면 유착)'할 수 있다. 특정 국가에 관심이 있으면 어학연수도 보내주고, 관련 기획취재도 도맡아 한다. 그 이후에 특파원을 오가며 그 나라의 전문기자로 자리 잡는다.
여기까지다. 이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지금 시대에 맞는 '저널리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판이란 게 없다. 흉내를 내지도 않는다. 상징적인 두 거대 언론사가 일본 언론의 전체상을 절망적으로 만들고 있다(이들을 길들이는 정치권이 나쁜 놈인지, 순순히 길들여지는 언론이 나쁜 놈인지, 그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겠다).
물론 저널리즘의 실종이 전부 그 둘만의 탓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기질이 '저널리즘의 수행'과 맞지 않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비하는 아니다. 잘 곱씹어보면 칭찬에 가깝다). '일본형 저널리즘'이라는 자조와 자위 섞인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떨어진 추락이 아니다. 있지만 없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마스코미'(マスコミ・매스컴)가 '마스고미'(マスゴミ・대중 쓰레기)라고 불리는 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일본의 저널리즘에 대해 좀 써보고 싶다고 S에게도 얘기했다. S는 꼭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독립한 그의 선배 M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기자들을 만나는 족족 (남 말할 처지는 못 되지만 결이 좀 다르다고 합리화한다) 그들만의 저널리즘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격한 공감을 보내는 게 더 이상하다.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문제의식이 없지 않다. 역시 일본 특유의 '집단'의 문제일까? 아니면 한계가 명확한 '조직 저널리즘'의 문제일까? 그 두 가지의 결합으로 빚어진 문제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앞서 말한 두 거대 언론사 소속 기자들과는 굳이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저널리즘 없는 일본형 저널리즘. 형편없다고 비난할 수 있지만 업계의 사정을 통해 일본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틈틈이, 단편적으로나마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