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저 기자클럽의 X맨

어느 기자의 부적절한 사견

by 지지구보꾸
절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질문을 얼버무려 넘기는 식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직설적인 답변은 금물입니다.


어떤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답변하는 이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지 조언하고 있다. 이 글을 받는 사람은 일본의 총리이다. 기자회견에서 곤란한 질문을 받은 총리가 어떻게 난관을 벗어나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글쓴 이는 다름 아닌 '기자'이다.


기자가 왜 정치인을 곤란한 상황에서 구제하려고 할까? 비판까지는 아니더라도 굳이 조언을 하는 이유는 뭘까? 총리는 기자의 조언을 따랐을까? 기자는 이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얻었을까?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발각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일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양국의 유사한 취재 시스템 상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단순한 구두 '조언'의 수준이 아니었다. 조언을 빼곡히 써넣은 종이가 그대로 발견됐다. 그 문서의 제목에 모든 게 담겨 있다. 오래전 일 아니냐고? 21세기의 일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그 개요와 전개를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한, 일본 언론계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다.


#일본은 '신의 나라'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일본 총리 모리 요시로의 입에서 나온 '신의 나라' 발언(2000.5.15.)이다.


일본은 당연히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라는 것을 국민이 확실히 알 수 있게 한다는 생각으로 활동해 온 지 30년이 지났다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모임 창립 3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천황이 전전(戦前)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존재였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이 발언은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국민주권'이나 '정교분리'의 원칙에 반한다"라고 간단히 한 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지만, "천황을 중심으로 한 대일본제국에 대한 향수와 동경의 발로"라고 풀어쓰면 그 무게감이 좀 다르다. 세계적인 전범국가 반열에 오른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건 그 진의를 떠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신의 나라'는 전전 천황 국가를 찬미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이다.


당연히 발언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모리 총리는 해명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관저와 내각기자회 사이에서 총리의 해명 기자회견 시간을 어느 정도로 할지 논란이 일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총리의 회견 시간을 관저가 정하면 되지 왜 기자들과 논의할까? 기자회견을 주최하는 게 '내각기자회'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회견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기자들이 있는 반면, 총리의 해명 회견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관저는 30분의 시간을 준비했고, 질문이 있을 경우에 연장도 가능한 것으로 정리했다. (실제 회견은 한 시간가량 이어졌다)


#사건이 된 '종이 한 장'

자, '사건'은 이 시점에서 발생한다. 모리 총리의 발언은 '발단'이었다. '저널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건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장소는 총리관저에 있는 관저기자클럽. 총리와 관저 취재를 담당하는 내각기자회 소속 기자들의 공간이다. 내각기자회 기자들은 이곳에 상주하며 총리나 관방장관의 기자회견을 취재하고 기사도 작성한다. 일본 총리 휘하 '관저의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정보를 입수하는 공간이다. 물론 정보를 '제공하는' 기자들도 있다.


총리의 해명 회견 전날 아침. 기자들이 함께 쓰는 공용복사기 근처에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종이를 발견한 건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니시니혼신문의 기자였다. 관저기자클럽에 캡(총괄), 관방장관 담당, 총리 담당 등 3명의 기자를 둔 규모가 가장 작은 신문사였다. 기자가 주워 든 종이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쓰여 있었다.


문서의 제목은 <내일의 기자회견에 관한 사견>. '신의 나라' 발언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에서 총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조언하는 내용이었다. 정황상 문서의 내용을 복사한 뒤 떨어뜨렸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복사기에 그대로 들어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쯤 되면 '보내는 이는 기자', '받는 이는 총리'라는 건 확실했다. 아래는 전문(개인적인 번역임).



<내일의 기자회견에 관한 사견>
이번 기자회견으로 인해 '당수토론은 하지 않았지만, 모리 총리는, 이 문제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단지 이번 회견은 매우 위험 부담이 있어서 지금까지와 같은 설명만 계속한다면 결국 민방을 포함한 매스컴들이 <모리총리 '신의 나라 발언' 철회하지 않아 변명으로 일관> 같은 제목을 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하십시오. 관저클럽의 분위기를 보면, 아사히신문은 "이 문제로 모리내각을 무너뜨린다"라는 명확한 방침 하에 철저히 몰아붙일 것을 선언했고, 다른 매스컴들도 여전히 "이번에 철저히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입니다. "틀린 사실을 말한 적 없고, 지금까지의 국회 답변 등과의 정합성을 생각하면, 발언을 철회할 수는 없다"라는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또 관방장관도 어제 회견에서 "철회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관방장관의 발언과 정합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견을 하는 이상, 총리의 입으로 '철회'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사실상의 철회'로 매스컴이 보도할 만한 발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매스컴도 야당도 이 문제를 지금까지와 같은 논조로 추궁할 수는 없게 됩니다. 이 경우, "왜, 지금까지의 발언과 다른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는 "진의를 알아주신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도 실제로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시게 해 폐를 끼쳤기 때문에"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상의 철회'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발언입니다만, "저의 발언 전체를 들어보신다면, 결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 주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부 발언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실제로 많은 분들에게 오해를 하시게 했고, 또 폐를 끼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발언 전체의 취지에 관해서 철회할 생각은 없지만,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이다'라고 발언한 부분에 관해서는 철회하고 싶다"라고 모두에서 밝히고, (공명당의) 가미자키 대표가 말한 것처럼, 국민주권과 신교의 자유를 견지하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같은 발언은, 모두에서 명확히 말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또, 이같이 방침을 바꾼다면, 사전에 관방장관과 간사장에게 이해를 시키는 게 불가피할 것입니다. 공명당이 즉시 환영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회견에서는 준비한 표현을 절대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추궁당할 것이라고 보는데, 반복적으로 헤쳐나가면서, 결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질문을 얼버무려 넘기는 식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총리께서 말씀하셨듯이 직설적인 답변은 금물입니다. 그리고, 아사히 등이 시끄럽게 해도 아무쪼록 시간을 오버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발언도 짧게 하고, 몇 개의 질문을 받고 난 후에 정해진 25분이 지나고 직원들이 강제로 중단하지 않으면 무덤을 파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홍보관이 그게 가능할지는 걱정이지만) 총리취임 회견 때도, 처음에는 호평이었는데, 예정을 넘긴 후의 질문에 총리가 진지하게 대답한 부분이 오히려 아주 평가가 나빴습니다. 아무쪼록 회견이 길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추적

총리를 비판해야 할 기자가 오히려 빠져나갈 구멍을 알려주고 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내각기자회 소속 기자들 중에 작성자가 있는 건 틀림없었다. 니시니혼신문의 기자는 '선을 넘었다'라고 생각했다. 어느 언론사일까? 어떤 기자일까? 취재 여부와 기사화의 판단은 총리의 해명 회견 이후로 미뤘다. 정말로 이 문서의 내용대로 회견이 전개되는지 확인을 해 볼 필요는 있었다.


당시 니시니혼신문의 관저 캡이었던 나가타니가와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2021.9.)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그대로 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리 총리의 발언이나 대응으로 봐서 문서대로 끌고 가려고 했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니시니혼신문 기자들은 당연히 '기사화'를 목표로 움직였다. 작성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취재를 시작한다.


발견된 종이는 열을 가해 글자를 표시하는 감열지다. 당시 기자들에게는 개인 PC가 보급되기 전이었다. 기자들은 취재나 기사 작성에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했다. 회사 내부와 공유해야 할 취재 내용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서 감열지로 출력했다. 이를 다시 복사기로 복사한 뒤 팩스로 보내는 식이었다.


니시니혼신문 기자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전자제품 제조사 중 한 곳에 감열지를 보냈다. 문서 작성에 사용한 워드프로세서가 어느 회사의 어떤 기종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지 의뢰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워드프로세서의 회사와 연식이 확인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해당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는 언론사, 즉, 이 감열지를 사용해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언론사는 그렇게 확인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문서의 내용으로도 어느 정도 심증이 있었다.

민방을 포함한 매체들이 <모리총리 '신의 나라 발언' 철회하지 않아 / 변명으로 일관>과 같은 제목을 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하십시오.

아사히신문은 '이 문제로 모리내각을 무너뜨린다'라는 명확한 방침으로 철저히 몰아붙일 것을 선언했고...

아사히 등이 시끄럽게 해도 아무쪼록 시간을 오버해서는 안 됩니다.

문서에는 '민방(민영방송)'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 민방 소속 기자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글에 등장한 아사히신문도 제외해야 한다. 문장을 쓰는 방식도 의심스러웠다.

여러 각도에서 추궁당할 것이라고 보는데, 반복적으로 헤쳐나가면서, 결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질문을 얼버무려 넘기는 식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쓸데없이 쉼표가 많은 문장으로 느껴졌다. '아나운서'에게 끊어 읽을 곳을 명확히 전달하려는 평소의 습관이 드러난 게 아닐까.


방송기자이지만 민방은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그렇게 추정된 언론사의 관저 캡은 취재진에게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엔 단순히 주운 문서를 전해주는 줄 알고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사화하겠다는 걸 알고 '할 테면 해봐라'로 대화는 끝난 것으로 전해진다


#집요한 '사건화'

이 정도면 기사화를 위한 확인 취재는 충분하다. 이제 실제 지면을 통해 사건을 알리는 것만 남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나온다. 니시니혼신문 측이 '기사'를 게재할 수 없다고 했다. 언론계 내부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다룰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취재진은 관저를 담당하는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에게도 함께 기사화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모두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칼럼이 절충점이 됐다.


신의 나라 발언

관저기자클럽 문서 발견

모리 총리 해명 기자회견

니시니혼신문 칼럼 게재


그렇게 이 문서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규슈 지역에서만 발행되는 지역신문(블록지), 그것도 기사가 아닌 칼럼을 통해서였다. 문서가 발견되고 일주일 후(2000.6.2.)였다. SNS도 없던 시절이었다. 기사의 내용이 담고 있는 고발성에 비해 영향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흐름은 달라졌다. 진보 성향의 TBS와 테레비아사히가 이 칼럼을 인용해 보도했다. 니시니혼신문은 뒤늦게 기사의 가치를 깨닫고 기사화에 나섰다. 지면에 문서 전문도 공개했다. 주간지들도 가세했다. 문서 작성자가 NHK의 기자라는 보도도 등장했다. NHK 회장은 해명 회견을 열고 이를 부정했다. 관저기자클럽도 총회를 개최했지만 '모른다'라고 결론 냈다. 정치인과 기자의 부적절한 소통은 그렇게 '사건'이 됐다.


#의혹은 있어도 결과는 없다

이 사건은 지남서(指南書) 사건으로 명명됐다. 일본 언론계의 구태와 악습, 또 그로 인한 정계와 언론의 유착이 '완전한 형태'로 확인된 보기 드문 사건이다. 이들의 유착이 미수로 끝났는지, 완전범죄가 됐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한낱 기자의 과한 충성이었을 수도 있다. 이 기자는 '사견'을 채운종이 한 장으로 본의 아니게 일본 기자클럽의 실체를 폭로한 언론계의 X맨이 됐다. 결과적으로 모리 요시로도 재임 기간 1년이 겨우 넘은 단명 총리에 그쳤다(그의 망언은 망언제조기라 불리는 아소 다로 못지 않다).


사건이 됐지만 역시 결과은 없었다. 일본에서 이런 패턴은 종종 볼 수 있다. 누가 봐도 결론이 나왔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의혹으로만 남아 일본의 공기 속에 부유할 뿐이다. 지남서 사건이 지금도 일본에서 회자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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