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리가 연출한 가부키회견

그런데 이제 히로시마를 곁들인

by 지지구보꾸

히로시마 원폭 돔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G7 의장국 기자회견이 개최됐다. 기시다 총리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이었다.


기자회견 시간은 30분으로 정해져 있었다. 기시다는 그중 23분 동안 발언을 이어갔다.


기시다의 발언이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내각홍보관은 손을 든 기자들 중 모두 4명을 '골라' 지명했다. 지지통신과 NHK히로시마 기자, 해외 미디어 기자 2명이 기시다 총리에게 질문을 했다.



기시다 총리는 앞에 놓인 종이를 보고 읽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고 다른 곳을 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종이에 의존했다.


일본 정치인의 기자회견을 조금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렇게 놀라운 장면은 아니다. '한심하게 저런 자리에서까지' 정도의 생각이 들 뿐이다.


내각홍보관이 손을 들고 있는 기자들 중 누군가를 지명하고, 그 누군가가 일어서서 질문을 하고, 총리가 낭독을 하고....


그 자리에서 어떤 기자가 선택받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기자 몇 명이 손을 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질문이 나올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기자들의 머릿속엔 저마다 묻고 싶은 내용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올 질문을 예상해 맞출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런데도 기시다의 모든 답변은 기자 네 명의 질문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일본의 총리는 '예언자'라도 되는 걸까. 어떻게 수십 명의 기자 중에 누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그에 맞는 답변을 종이에 정리해서 가져왔을까?


기자도, 질문도, 답변도 모두 준비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연출이었고 연기였다.



준비된 질문과 답변이 모두 끝나자 기시다는 자리를 뜨기 위해 뒤돌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질문을 하겠다며 손을 들고 있는 기자가 눈앞에 있었지만 '합의되지 않은' 행위가 받아들여질 리 없다. 맨 앞줄에 앉아있는 기자가 줄곧 손을 든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전에 정해진 미디어 말고도 질문하게 해 주십시오"


"핵군축 비전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총리 부탁합니다"


"정해진 미디어만 질문을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개 사만 정해져 있는 건"


"핵군축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총리. 질문 하나로 좋습니다"



그는 아사히신문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된 도시히코 오가타이다. 도시히코의 혼잣말이 울려 퍼질 때 내각홍보관은 회견장을 정리하는 안내 멘트를 하고 있었고, 기시다는 정면(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각홍보관이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기시다도 기다렸다는 듯이 단상 위 파일을 덮고 뒤로 돌았다. 이때 도시히코의 한 마디가 회견장의 공기를 때렸다.


"총리, 도망가는 겁니까?"


놀라운 건, 기시다가 멈춰 섰다는 것이다. 자신도 멋쩍은 듯 전용차량이 있는 쪽을 향해 손짓을 한번 하더니 뒤를 돌아 다시 단상 앞에 섰다.

기자회견장을 떠나려던 기시다가 "도망가는 겁니까?"라는 말에 다시 돌아서고 있다


"핵군축 비전에 대해 대답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라고 기시다가 답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이 주창했던 '히로시마 액션 플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핵군축 문제는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저널리즘과는 무관한 내용이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도시히코는 이런 전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AERA에 기고한 글에서 질문자와 질문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누군가가 귀띔해 줬다고 밝혔다.


"회견은 30분간. 회견에서 질문하는 회사도, 질문도, 사전에 전부 결정돼 있어요. 관저기자클럽, 해당 지역인 히로시마기자클럽, 그리고 외국프레스입니다"


도시히코가 꼭 질문하고 싶다고 하자 '무리'일 거라고 그 기자는 다시 말해줬다. 도시히코가 기시다의 눈앞에 앉은 건 그 때문이다. 내각홍보관이 질문을 할 네 명의 기자를 지명하는 동안 도시히코의 손은 계속 번쩍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내각홍보관이 끝인사를 할 때 방송국 카메라들은 기시다의 얼굴을 잡고 있고, 도시히코의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린다.


눈 아래에서 번쩍 들어 올린 손을 못 볼 리 없지만 기시다의 눈빛은 그쪽으로 절대 향하지 않는다(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기자가 손을 들거나 질문을 하더라도 절대 쳐다보지 않는다'는 확고한 방침이 없는 한 이렇게 하기도 쉽지 않다. 도시히코의 모습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보였다.


내각홍보관은 정말로 질문자를 그 자리에서 '고르는' 척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는 한심한 연기였다.



"자, 그럼 다시 한번 일본 기자분들 중에서 질문을 받겠습니다. 거수를... 자, 건너편 블록의 네 번째 열 끝에 계신 분.


"지역 히로시마 기자클럽에서 NHK히로시마방송국의 000가 질문하겠습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이런 장면은 일본을 아는 사람에게는 놀랍지 않다. 오히려 시나리오 없이 기자회견을 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사전에 연출된(한심한) 기자회견을 일본에서는 '가부키회견', '차반(茶番)회견'이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한다.


'차반'이란 말 그대로 '차를 준비하는 역할(당번)'을 뜻한다. 과거 일본의 연극계에서는 배우 견습생이 차 당번을 맡았는데 그들이 틈을 내서 하는 연기를 그대로 차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에 유래해 '서투르거나', '바보 같은' 짓을 차반이라고 한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히로시마 기자회견에서 9분 동안 준비해 온 원고를 낭독했지만 29분간 기자들의 질문에 메모 없이 대답했다. 때마침 우크라이나에서 날아 온 젤렌스키 대통령도 아무런 시나리오 없이 기자회견을 개최했고, 15개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들이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이게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 상식이 일본에선 비상식이 되기도 한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건, 총리 관저의 홈페이지에는 그날 기자회견에서 있었던 발언 중 유일하게 도시히코의 질문만 실리지 않았다. 텍스트만 보면, 홍보관의 끝인사 '감사합니다'가 나오고 난 뒤, 기시다가 다시 혼자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도시히코의 질문은 홈페이지에서조차 뺀 것이다.


이것은 합의의 정신에 위반되기 때문일까. 철저한 매뉴얼의 준수일까. 아니면, 융통성의 문제일까. 일본의 저널리즘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들이다.


내각홍보관의 끝인사(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뒤 기시다의 말이 다시 시작된다(총리관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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