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고 스승이고 연인이었던 나의 DJ들에게
그와의 만남도 곧 끝난다. 다섯 번 남았다. 오후에도 행복하셔야 합니다. 라는 격려랄까 응원이랄까, 아니지 강요. 그래 다정한 강요를 남기고 사라지던 사람. 오전의 마무리, 이루마의 골든 디스크. 오전 열한시부터 열두시까지 거의 날마다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박원웅과 김창완, 김기덕, 이상은에 이어 이루마가 골든디스크의 디제이가 된 것은 2012년부터. 나는 시골로 이사한 2016년부터 다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으니 꼬박 3년이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학창 시절엔 라디오를 가까이 했다. 이문세의 별밤을 들은 시절은 짧았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음악도시를 이끌었던 시장님들, 신해철과 유희열, 이소라, 성시경은 내 학창시절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신해철은 자꾸만 자꾸만 나의 토양에 사유의 씨앗을 심었고 유희열은 너도 나처럼 찌질할 줄 알았다는 투로 낄낄거리며 지저분하고 섹시한 개그를 날려댔다. 성시경의 잘자요, 마지막 인사는 듣기 전에 꺼버리곤 했지만, 그가 들려준 음악들은 내 맘속에 파도를 만들곤 했다. 잡지 마감 때문에 형광등 아래에서 밤을 새우는 날에도, 손바닥만한 원룸에서 홀로 잠드는 날에도 나는 라디오를 켰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날이면 크게 울었다.
개편이나 하차라는 말로 간단히 말해버리면 안된다. 섭섭하다. 이건 명백한 이별. 아주 커다란 이별이다. 매일 가까이에서 속삭이던 사람이 내일부터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믿지 않다가(부정), 그럼 그 시간에 난 대체 뭘 들으라고? 하며 화를 내다가(분노), 그래 후임 디제이의 말소리를 들어나 보자 하며 라디오를 켰다가(협상), 야 이건 좀 아니지 않냐며 나락으로 떨어지다가(우울), 여기저기 다른 채널을 돌려 끝내 다른 대화상대를 찾아내고 만다(인정).
물론 떠나지 않고 늘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지난 3월 19일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29번째 생일이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 시간을 잊지 말자고 결심했다. 오후 내내 J와 카페에 마주 앉아 마음을 죄다 꺼내놓고,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날이었다. 울다가 웃다가 미워하다가 용서하고 용서받고 끝내 연민하고 마는 그런 날.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날이 하필 배캠의 생일이었다. 그 저녁을, 평소보다 좀 들뜬 디제이의 목소리를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백발의 디제이가 청취자들과의 긴 만남을 끝내는 날이 온다면, 그날 특별히 슬퍼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큰일이다.
가장 최근 겪은 이별은 지난 가을, ‘오후의 발견 김현철입니다’의 김현철이었다. 오후 네 시부터 여섯시, 오래된 유행가를 틀어주며 오래된 유머를 구사하던 그는 마지막 방송의 마지막 곡으로 자신의 노래, 원더풀 라디오(Wonderful Radio)를 틀었다.
그래 그랬었어 오랜 친구가 있었어
힘들고 지친 내 맘을 위로해 준
지금 어디선가 그대도 듣고 있겠지
그대와 나만의 원더풀 라디오
지금껏 많이 좋아했던 노래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설레던 얘기와 그립던 시간들
그 모든 걸 원더풀 라디오
못다 한 얘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라는 말을 남기고 매일 사라지던 그는 마지막 날, 오늘 못다 한 얘기는 가슴에 깊이 묻어두겠습니다, 라는 말로 인사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배캠이 시작됐다. 언제나처럼 뭐 별일 없었다는 듯이 시그널 뮤직,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의 Satisfaction이 들려 왔다. I can’t get no satisfaction, no, no! I can’t get no satisfaction, no, no! 누군가와 이별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나의 세계는 무너졌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지구가 멀쩡하게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허탈감을. 여전히 해는 뜨고 출근은 또 시간 맞춰 해야 하고 점심은 김치찌개냐 된장찌개냐 선택해야 하고 퇴근길은 어김없이 붐비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출발한다.
나는 아직도 오후 네시의 디제이를 정하지 못했다. 저 노래의 가사처럼,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졌다. 이루마. 그래 이루마로 돌아가자. ‘이루마의 골든디스크‘를 듣던 시간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12시. 민박 손님이 퇴실한 후 객실을 청소하는 시간이었다. 작은 방에 라디오를 켜두고 작업을 시작한다. 타인의 살 냄새가 짙게 밴 공기를 환기하는 일이, 눅눅해진 이불을 벗기고 새 이불을 씌우는 일이, 무엇이 들어있을지 모를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이 기꺼울 리 없다. 그럼에도 매일 웃으며 할 수 있었던 건 라디오 덕이었다.
그런데. 이루마가 떠난단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를 김현철이 채운단다. 지난 가을 이별했던 그 사람이 돌아온단다. 비워지고 또 채워진다. 카프카의 말처럼,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인생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슬픔의 다섯 단계를 모두 지나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도 다시 털고 일어나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