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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Aug 22. 2023

태어난 김에 여행하는

설거지하며 태블릿으로 틀어 놓고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젊은 남녀들이 모여 며칠씩 같이 지내며 ‘짝’을 찾는 프로그램인데, 이게 적잖이 재미나다. ‘단 며칠 동안에 사랑의 감정이 싹틀 수가 있을까?’하고 궁금해하면서도 한 출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난 이성을 보면 3초 안에 느낌이 와요!” 아! 정말 설레는 말이다. 남성 출연자들의 면면을 보며 ‘저 사람은 서울에 자가를 갖고 있는 것이 장점이고 저 사람은 술 마시는 매너가 꽝이고.’라고 생각해 본다. 마치 내가 저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성 출연자가 되기라도 한 듯 몰입되어 보느라 설거지하는데 한 세월이 걸린다.


아이가 등교하고 남편이 출근한 조용한 아침, 난 커피를 내리고 달달한 그 무엇인가를, 이를테면 딸기 생크림케이크 같은 것을 한 조각 꺼내 식탁에 앉는다. 신나는 트로트를 틀어놓고 신문을 본다. 청소기 돌리기 같은 뭔가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난 그냥 오롯이 내 시간을 즐긴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시간엔 우리 동네 골목마다 새로 생겨난 카페에 들러 본다. 이 카페는 아이스커피가 산미가 강해서 시원하고 저 카페는 크로와상을 와플기계에 눌러 구운 크로플이 맛있다. 이번 주에 새로 생긴 온통 분홍색으로 인테리어를 한 카페에는 귀여운 고양이가 세 마리나 있다. 회색이, 삼색이, 깜장이. 우리 강아지 네모와 함께 정신없이 구경하다 황태포 간식도 나눠주고 돌아온다. 생긴 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는데, 갈 때마다 간식을 나눠주니 우리가 지나가면 고양이 세 마리가 허겁지겁 카페 베란다까지 뛰어나와 양냥거린다.


‘길티 플레져'란 말이 있다. ‘길티 플레저’는 영어 길티(guilty·죄책감이 드는)와 플레저(pleasure·즐거움)를 합성한 말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 또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동시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심리를 말한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취향을 가진 것도 길티 플레저이다. 남들이 알면 부끄럽고 민망한 취향이고 누구에게도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내 안의 비밀이다.


최근 나에겐 또 하나의 길티 플레져가 생겼다. 태어난 김에 여행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이다. 여행할 때 30분 단위로 계획을 촘촘히 세워놓고 움직이는 나로서는 주인공의 행태가 신선하다 못해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디든 그가 눕는 곳이 침대이고, 그가 먹는 곳이 식탁이다. 그야말로 무계획의 끝판왕이다. 강물도, 산꼭대기에 쌓여 있는 만년설도 그에게는 훌륭한 수분 공급원이다. 태어난 김에 여행하는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같은 프로그램을 몇 번씩이나 돌려봤다.


글도 쓰고, 빵도 굽고, 가방이며 옷도 만들고, 자수도 놓고, 첼로 음악을 즐기는, 남들에게 보여주는 대외적인 나의 모습 에는 이런 길티 플레져를 즐기는 나도 있다. 이 은밀한 나도 사랑스럽지만, 자랑스럽진 않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집안에서만 이런 모습이 자유로워진다. 오늘도 난 트로트를 빵빵하게 틀어 놓고 엉덩이를 실룩이며 청소기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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