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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Aug 22. 2023

사랑의 힘으로

첫 직장은 항공사였다. 승무원으로 일하기 전엔 예쁜 스카프를 매고 기내를 사뿐사뿐 돌아다니며 음료 서비스를 하는 것이 일의 전부인 줄 알았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승무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승객들의 안전을 살피는 것! 응급구조법, 비행응급구조장치에 대한 교육을 비행을 할 때마다 받았다. 또 1년마다 받는 정기 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에 합격해야 비행자격이 주어졌다. 화상, 열상, 자상, 짐이 승객의 머리 위에 떨어져 입는 타박상 등 여러 가지 경우에 대비해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손님들끼리 카드게임을 하다가 싸움이 난 적이 있었다. 서로 주먹으로 치고받다가 격분한 한 승객이 다른 승객의 팔을 기내식 나이프로 다치게 했었다. 그 사건 이후로 기내식용 포크와 나이프가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


런던으로 가던 비행 중이었다. 그날도 승객의 안전을 살피기 위해 30분에 한 번씩 물과 주스를 들고 별 일은 없는지 기내를 순찰했다. 10시간 넘는 긴 비행에서는 승객들의 숙면을 위해 기내 등을 꺼두는데 깜깜한 기내에서 어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승객들 중 한 아가씨의 자세가 이상했다. 자는 것 같았으나 고개가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다른 승객의 양해를 구하고 안쪽에 있는 자리로 접근했다. “손님, 손님!” 하고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코끝에 손을 대어 보니 호흡이 불규칙하고 얕았다. 즉시 의사를 찾는 방송을 하고 담요를 문 옆 바닥에 깔아 승객을 옮겨 눕혔다. 탑승한 의사는 없었지만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응급조치를 하니 다행히 승객은 금방 깨어났다. 승객은 머뭇거리며 자리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가 사실 폐쇄공포증이 있어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비행기 타는 건 무리인데도 보러 가는 중이에요. 아까 불 켜져 있을 땐 몰랐는데 식사가 끝나고 불을 끄니 너무 갑갑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기절을 했나 봐요. 안정제도 먹고 했는데 너무 죄송해요, 힘들게 해서.” 승객은 말했다. “아닙니다. 힘들다니요.” 내가 말했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3시간 비행한 후, 1시간을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런던까지 가는 12시간가량의 비행. 16시간 동안의 비행을 이 작은 몸집의 승객이 견뎌내는 중이었다. 남은 비행시간을 비좁은 안쪽 좌석에서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폐쇄공포증은 닫힌 공간에 있거나 그런 곳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무서움을 느끼는 증상이다. 심해지면 공황발작이 오기도 하는데 호흡곤란, 질식감, 어지러움, 메스꺼움, 구토, 경련 및 발작 후 기절을 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서울에서 의사가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주먹을 꼭 쥐고 처방받은 안정제 몇 봉지로 무장한 채 공포감에 떨며 비행기를 탄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나는 사무장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만석이라 빈 좌석이 없었으므로 비상구 옆에 있는 승무원 좌석에 그 승객을 앉혔다. 나도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궁금해하고 있던 서울소식, 승객의 연애의 역사, 홍콩에 사는 얘기 등을 나누다 보니 식사 제공시간이 되어 기내 등이 켜졌다. 기내가 밝아지니 승객의 얼굴도 밝아졌다. 안정을 되찾은 승객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기내식 제공을 하고 난 뒤 비행 마무리 업무를 했다.


인연이 닿았는지 런던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 승객을 또 만났다. 다행히 만석이 아니어서 다른 승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 옆의 좀 넓은 공간이 있는 좌석으로 옮겨드렸다. 옮겨드린 좌석이 승무원 서비스 공간인 갤리와 가까워서 서비스가 끝나면 말을 걸며 손도 잡아 드리고 열이 나는 것 같다고 해서 찜질용 얼음을 가져다주었다. “그 사람이 이번에 청혼했어요.” 승객은 수줍게 말하며 약혼반지를 보여 줬다. “봄이 되면 그 사람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거예요. 그럼 바로 결혼하려고요.” 나는 “정말 멋지네요!”하고 대답했다. 폐쇄공포증을 견뎌낸 사랑의 힘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빌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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