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홍콩에서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며 휴가 때면 배낭여행을 떠났다. 처음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이태리의 피렌체에서 난 피렌체 엄마를 만났다.
그날 나의 무거웠던 마음과는 달리 베키오 다리 위는 활기찼다. 교각을 따라 쭉 늘어선 노점 매대 위에서 석양빛을 받은 팔찌, 목걸이들이 반짝이며 짤랑거리고 있었다. 눈앞에 장신구를 들이대며 흔들어대는 건강한 미소의 청년. 공중에 향수를 칙 칙 뿌려대는 향수가게 점원들. 화려한 문양으로 염색된 스카프를 한꺼번에 여러 장씩 손에 들고 훑어 내리며 “벨라(젊은 여성을 부르는 호칭,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 벨라!”를 불러대는 아저씨들. 향긋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커피 잔을 홀짝이며 계단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아주머니들께 물었다. “저…, 이 동네에서 가장 싼 숙소가 어디인가요?” 머리에 70년대 영화 주인공처럼 스카프를 꼭꼭 여며 쓴 작은 몸집의 아주머니 한 분이 내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떨림을 느꼈는지, 넘쳐나는 미소를 떨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벨라, 무슨 일이 있나요?” “제 이태리 열차 패스에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날짜를 착각해서 오늘밤에 잘 곳이 없어요.” 절박한 마음으로 울먹이며 쏟아내는 내 말에 아주머니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 소년을 불렀다. “나의 아들, 에밀리오, 우리 벨라한테 무슨 문제가 있대. 너무 빨리 말하니까 못 알아듣겠네. 네가 우리 집에 데려가서 저녁을 챙겨 줘. 우리 벨라가 배고파 보여.” “벨라, 이쪽으로.” 사양하고 싶지만, 그냥 저렴한 숙소만 소개해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주머니의 다정한 미소에 난 그만 긴장이 풀려 무릎이 꺾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베니스로 이동하는 기차 예약은 그다음 날로 되어 있었는데 피렌체에서 지내던 숙소는 그날 아침에 퇴실을 해야 했다. 예약 실수가 있었단 것을 깨닫고 숙소에 1박 연장을 신청했으나 성수기라 방이 없었다. 길에서 밤을 보낼 순 없으니 빈 방을 찾아 낯선 길을 12시간 가까이 헤매고 있었다. 그때 나의 구원자, 스카프를 머리에 쓴 피렌체 엄마를 만난 것이다. “벨라, 이 커피 마셔. 이태리 커피, 에스프레소. 그리고 우리 집에 가. 뭐든 먹고 나면 모든 게 달라져.” 갈색 머리 천사, 에밀리오를 따라 집으로 가서 라쟈냐와 샐러드를 푸짐하게 대접받고 나니 피렌체 엄마가 나타났다. 오늘 밤 잘 곳이 없다는 나의 말을 듣고 피렌체 엄마는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층 방이 마침 비어 있어. 우리 딸이 저번 주에 대학 기숙사로 갔거든. 우리 벨라는 운도 좋지. 저번 주에 왔다면 일층 소파에서 자야 했을 거 아냐. 내가 시트도 갈아줄게.” 이층 방에 올라가니 크림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밖으로 아름다운 피렌체 야경이 보였다. 아까 피렌체 엄마를 만났던 베키오 다리도 보였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어느새 난 잠이 들었다.
꿀잠을 자고 나니 아침 햇살이 화창했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피렌체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벨라, 너를 위한 꿀을 바른 토스트야. 버터도 듬뿍! 아침엔 카푸치노! 거품을 마셔봐. 저기 저 하늘의 구름같이 부드러워.” 피렌체 엄마가 말했다. 다정하게 나를 챙겨주는 말을 들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울컥 눈물이 났다. 피렌체 엄마는 그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침밥을 다 먹어갈 때쯤 피렌체 엄마는 까만 오닉스가 장식된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주며 말했다. “벨라,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이거 가져가. 선물이야. 너의 까만 눈동자와 닮았어. 이 반지를 볼 때마다 나와 아름다운 피렌체를 생각해 줘. 다음엔 어느 도시로 가니? 베니스야? 내가 베니스 호텔 예약 확인해 줄게.” 전화를 몇 통 하고 기차와 호텔예약이 잘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피렌체 엄마는 힘찬 포옹을 하며 날 배웅해 주었다.
첫 배낭여행을 무사히 마치며 ‘피렌체 엄마, 나를 위해 선뜻 당신 딸의 방을 내 준 친절한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게요.’ 하고 나는 다짐했다.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나는 비행기에서 일하며 여행 중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피렌체 엄마처럼. “고마워요, 피렌체 엄마. 당신 덕분에 제 세상이 더 아름다워졌어요. 당신이 준 반지는 잘 간직하고 있어요. 당신을 항상 기억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