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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Aug 22. 2023

그린 커튼

초록 콩 넝쿨이 꼬불꼬불 줄을 타고 올라간다. 하트모양 싱그러운 잎들이 계단처럼 층층이 졌다. 그 사이로 자라난 꽈리 넝쿨아래 아직 익지 않은 꽈리열매가 연초록 얼굴을 내보인다. 보도에 줄줄이 늘어선 화분에서부터 건물 옥상까지 이어진 노끈을 타고 벌써 내 키보다 크게 자랐다. 돌아서면 자라는 게 콩이라 더니 올 가을엔 콩깨나 수확하겠다.


얼마 전부터 부평아트센터에 연극 수업을 들으러 다니고 있다. 첫날 연습실 입구 주변에 화분만 줄을 지어 놓여있는 게 눈에 띄었다. 화분에 묶인 노끈이 옥상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게 뭐지?’ 옆에 친절하게 적어 놓은 안내판이 있었다. ‘그린 커튼’이라는 것이었다. 그린 커튼을 설치하면 식물이 자라나면서 생기는 그림자 때문에 실내온도가 5도 이상 시원해진다는 설명이었다. 시에서 지원받아 에너지 절약을 위해 설치된 공공사업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린 커튼이라고?


어릴 적 우리 동네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었다. 그곳에선 언제나 친구들이 놀고 있었다. 평상 한편으로 바둑판과 군용 담요에 둘둘 말려 있는 윷놀이 감이 놓여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수박을 썰어서, 부침개를 부쳐서,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서 평상으로 모이곤 했다. “한 여름엔 우리 동네 평상이 천국이야. 저어기 보이는 돌산 계곡보다 더 시원하다니까.” 누군가 시장에서 닭 한 마리를 튀겨오면 또 누군가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 와서 어른들의 즉석잔치가 벌어졌다. 평상 옆에 서있던 높디높은 우리 동네 지킴이 느티나무가 이 모든 것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평상을 시원하게 만든 건 느티나무였다. 그린 커튼과 같은 원리로 느티나무 그늘 덕분에 나무 밑 평상이 5도 이상 시원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시원한 나무그늘의 혜택을 받아왔다.


곳곳에 그린 커튼이 설치되는 것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좋은 일이다. 환경개선에도 도움이 된다니 더욱 좋다. 기왕이면 ‘그린 커튼’ 보다는 ‘녹색 처마’ 같은 순우리말 이름을 지어주면 더 좋았을 텐데. 혹시 심은 콩이 수입 콩인가? 그래서 영어이름으로 정했나? 요사이 많은 공공사업의 명칭이 줄임말 또는 외국어를 사용하여 명명되고 있다. 줄임말 명칭은 낯설고 그린 커튼 같은 외국어 명칭은 한글을 알고 있어도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우리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오랫동안 나무그늘을 이용해 왔다. 나무도 우리 나무요, 그늘도 우리 그늘이다. 그린 커튼 사업도 아름다운 우리말로 된 사업명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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