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시작하게 된 건, 스스로에게 던진 작은 도전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날, 동네 게시판에 붙어 있던 그림 수업 광고가 눈에 들어왔고,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처음 붓을 쥐었을 땐 어색했다. 손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고, 빈 종이 위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조용히 스케치북을 채워가면서, 내 마음속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수업은 단순히 그림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그림을 보며 웃고 격려하는 시간들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서툴고 부족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묘한 연대감이 생겼다. 각자의 삶과 감정을 그림에 담아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지역의 작은 예술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굿즈 제작에 참여했을 때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그린 어반스케치가 달력에 찍혀 나왔을 때, 그것을 손에 들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뭉클했다. "내 그림이 이렇게 쓰일 수 있구나." 그림 하나가 나를 넘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 그림이 지역 소식지에 실렸을 때는 얼떨떨하면서도 벅찼다. 내 일상을 담은 스케치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미소나 따뜻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 그림이 나의 이야기를 대신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전시회였다. 나의 그림이 하얀 벽에 걸리는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동안 서툴고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그림들이 마치 나를 대변하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전시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이 가진 힘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림을 배우기 전의 나는 나만의 세상 속에 갇혀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것도 어색했다. 하지만 그림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대신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줬다. 작은 도화지 위에 시작된 한 줄의 선이 이렇게 많은 만남과 변화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지금도 스케치북을 펼칠 때마다 그 시작의 설렘을 기억한다. 내 그림은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그런 서툼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가 담긴다. 그림은 나를 치유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해 주고, 내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그림이 내 삶에 던진 작은 파동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퍼져갔다. 그리고 그 파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내가 그린 선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에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주길 바라면서, 오늘도 스케치북 위에 첫 선을 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