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하트모양 상자

김혜진 작가의 [오직 나만의 것]을 읽고

by 김제니

김혜진 작가의 [오직 나만의 것]을 읽고 사람들과 둘러앉아 책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주인공이 꽤 큰 성공을 이뤘음에도, 부모가 바랐던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한 거 아닌가요? 왜 더 당당할 수 없을까요?”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주인공이 느낀 건 죄책감이 아니라, 그저 나이 들어가는 부모에 대한 안쓰러움, 연민 같은 감정이라고. 그 말을 듣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내가 느낀 죄책감은 주인공의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숨어 있던 감정이었다는 것을. 독서란 참 이상하다. 남의 이야기를 읽는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병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아버지를 물들여갔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스무 살의 문턱도 밟기 전에, 나는 삶의 다른 문턱 몇 개를 허겁지겁 넘어야 했다. 삶이 나보다 먼저 달려가고, 나는 그 뒤를 숨이 차도록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낮에는 학교에 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원비와 약값을 보태려면 잠은 제일 먼저 포기해야 했다. 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고, 나는 그 시절을 그저 견뎌냈다. 외국 항공사에 합격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아버지의 병원비와 생활비가 해결됐다. 혼자 계실 아버지가 걱정됐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살아야 했고, 버텨야 했다. 홍콩에서의 10여 년, 나는 항공사 승무원으로 지구를 누볐다. 북반구의 한기를 지나 남반구의 여름에 도착하고, 도시의 불빛과 별빛을 번갈아 보며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기쁨을 배웠다. 내 선택에는 후회가 없다.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아버지의 치료도, 생활도, 내가 번 돈으로 가능했다. 내가 걸어온 길은 분명 내 힘으로 연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어 드렸다면 어땠을까. 맛이 없더라도 내가 끓인 국을 한 번 더 차려드리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알래스카에서 빙하에 굴을 파고 사는 작은 생명을 보았을 때, 밤하늘을 가득 채운 오로라가 내 눈앞으로 쏟아질 때. 남아프리카에서 아기 치타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이런 귀여움이 있다니!’ 하고 감탄할 때도 나는 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빠가 보면 참 좋아하실 텐데.”

“아빠도 동물 좋아하시는데.”

그 생각들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세계를 나만 보고 있다는 미묘한 서운함, 그 세계를 함께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어두운 그늘이었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에게서 죄책감을 읽어냈던 이유도 그것이 결국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깊은 슬픔을 이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 부담과 사랑, 후회와 확신, 아쉬움과 자부심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 [오직 그녀의 것]을 읽고 나는 느꼈다. 석주도 마음속에 작은 상자를 하나 품고 있다는 걸. 석주 자신도 모르는 채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상자. 석주와 나 사이에 놓인, 붉은 하트모양의 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프시기 전 아버지는 평생 형사로 일하셨다.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치고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범인을 잡으러 출동하던 사람. 나는 늘 선잠 속에서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피곤했을까, 무서웠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다졌을까. 지금은 아무리 궁금해도 물어볼 수가 없다. 남은 건 묵직한 감정뿐이다. 죄책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부드럽고, 슬픔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한 감정. 그 감정은 마음 한쪽에 돌처럼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한 자부심이 뒤엉킨 덩어리가 담긴, 떨쳐낼 수 없는 무게의 붉은 하트모양 상자로.


[오직 그녀의 것]을 읽으며 느꼈던 주인공 석주의 감정은 결국 그 상자 안에 잠들어있던 나의 감정이었다. 책이란, 마음 깊숙이 잠겨 있던 상자 하나를 열어젖히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한구석에서 잊힌 채 먼지만 쌓여있던 붉은 하트모양 상자.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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