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롭다는 감정을 글 대신 몸으로 배웠다면
담 너머로 무화과나무가 가지를 뻗는다. 좋게 말해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낡은 집이다. 녹이 슨 굵직한 남색 대문을 따면 낮은 돌계단이 보인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있다. 바닥에서 귀뚜라미가 가끔 튀어 오른다. 동네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연탄을 떼고 LPG가스를 사던 집, 가장 오래 살았던 우리 집이다. 동네 맨 위에는 아파트가 있고 그 아래로 빌라가 촘촘히 몰려 있었다. 아파트 모퉁이 놀이터에는 동네 꼬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았다.
그중 한 여자아이와 유난히 가까워졌다. 여러 계절을 함께 보냈다. 온 동네를 누비며 깔깔거렸다. 찬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날에는 집에서 같이 게임도 했다. 친구가 말했다. 너희 집이 너무 추워서 이불을 가져와야겠어.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당황했다. 너, 그렇게 말할 거면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마. 어색한 공기로 침묵을 메꿨다. 매일같이 보다가 갑자기 연락이 뜸해졌다. 사이가 멀어질까 봐 고민했던 긴긴밤이 지금도 생생한 반면 다시 잘 지내게 된 과정은 기억이 안 난다. 아이들이 그렇듯 금세 잊고 가깝게 지냈다.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지만.
사실, 친구가 불편한 건 나였다. 아파트에 살았던 친구는 가난을 몰랐다. 친구를 만나면서 가난을 알게 된 건 나였다. 애매했던 울적함의 해상도가 높아졌다. 새벽같이 식당으로 일하러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항상 기다렸다. 겨울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어도 숨을 쉬면 하얀 입김이 서렸다. 화장실에서 귀뚜라미가 튀어나와 놀랄 때도 많았다. 사실 가장 싫은 건 엄마를 닮지 않은 외모였다. 엄마는 날씬하고 쌍꺼풀도 진한데 나는 왜 아빠를 닮았을까?
지금 이 순간 한 사람이 떠오른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말이 많은 여자아이, 바로 초록지붕 아래 사는 빨간 머리 앤 이다. 앤도 나처럼 불행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한다. 빨간 머리와 주근깨- 외모에 대한 불평도 있다. 앤은 실수가 기록되었지만 내 실수는 다행히 책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다행이다. 사람들은 보통이라는 기준이 없다고 말하지만 내심 선을 긋는다. 앤도 나도 전형적인 형태의 가족, 외모, 환경 등 사람들이 원하는 일반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설 속 앤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남이었던 마릴라와 매슈가 누구보다 따듯한 가족이 되어주어서는 아니었을까?
이렇다 할 근사한 어른은 아니지만 앤처럼 불안하던 한 여자아이도 무사히 어른이 됐다. 나에게도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따듯한 피난처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완결이 난 빨간 머리 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길버트와 결혼을 하거나,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는 못했다. 다만 끝이 아니기에 더 나은 이야기로 남길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