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조현병은 정신분열증의 요즘말이다. 정신분열증이 억센 표현이라고 생각했는지 몇 년 전부터 조현병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경중은 이름을 따라가지 않아도 바라보는 사람들이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빠는 17년째 조현병과 앓는다. 시작은 친구였던 사람의 학교폭력이었다. 오빠는 남들보다 몸집이 큰데, 순했다. 이름답지 않게 살았던 미치광이는 오빠를 괴롭혔다. 괴롭혔다는 네 글자 안에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을 담을 수 있을까? 그는 한 사람의 존엄과 내면은 부셨다. 나중에 대학원에 가고, 이름도 개명했다고 들었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가볍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는 모양이었다.
<더글로리>에서 나온 대사가 밈이 되고, 학교폭력이 밝혀진 유명인들에게 앞길이 막힌다. 유명인정도는 되야 가해자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시대다. 여전히 생존자는 살기가 버겁다.
자신에게는 돈이 있기에 굳이 자녀가 한쪽에 처한다면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낫다고 대답한 원작자와 달리 대부분 생존자들은 돈도 힘도 없는 더글로리 속 동은이의 상황이다. 다른 점은 주인공처럼 상황을 설계할 의지와 조력자 대신 아픔으로 점철되어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 억만배의 힘이 든다는 사실이다.
조현병의 증상은 주환청과 망상이 주를 이룬다. 공격적인 말이 환청으로 들리고, 망상으로 이어진다.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다. 약을 먹다 보면 몸이 둔해진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 힘들기 때문에 조현병환자에게만 상황이 유리하게 배려할 수 없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약을 먹어도 환청이 심해진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대학도 직장도 다니기가 힘들다. 사람마다 역치가 다르다고 하지만 조현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작은 자극도 크다.
지금 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오빠가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순간이 버거웠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벌컥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쌍욕을 뱉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실수로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일이든 한참 뒤에야 갑자기. 화를 냈고 폭풍이 지나면 금방 미안하다고 했다. 약을 먹어서 어쩔 수 없다고.
오빠는 꾸준히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었다. 당시 정신과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폐쇄적인 곳이었는데 오빠는 병원을 찾았다. 엄마와 아빠는 늘 먹고 살기에 바빠 집에 없었다. 오빠가 아프고 난 뒤에도 가장 많은 대화를 하는 사람은 나였다. 안쓰러운 감정만큼 불편한 감정이 출렁거렸다. 대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화를 내기 직전까지는 너무나 유순하고, 다정했다. 우리 집에 온 친구들은 너네 오빠처럼 다정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러다 어느 순간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항상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생각했다. 최대한, 오해하지 않게 말해야 한다고.
내가 수련회에 갔던 날 전화를 걸려왔다. 제천으로 수련회를 갔던 둘째 날 밤이었는데 일정이 끝나고 저마다 둥그렇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오빠가 갑자기 왜 전화를 했지? 궁금해하며 문을 나섰다. 슬리퍼를 끌고 교회 건물 앞 공터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가 없어서 너무 불안해."
"오빠, 나 이틀 뒤에 갈 거야."
"나.. 너무 힘들어서 손목 그었어. 자국 남았다. "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빠가 걱정되기보다 왜 내가 먼 곳에 있을 때 저렇게 말할까 싶었다. 화가 났다. 우 겨우 오빠에게 다정한 억양으로 말하기 위해 호흡을 길게 뱉었다.
"오빠, 조금만 참아, 나 빨리 갈게,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그래, 알겠어..."
전화를 끊고 수풀 앞 회색 돌 문턱 위에 앉았다. 버거웠다. 손목까지 긋다니. 이럴 거면 가지 말라고 하지. 아니 가지 말라고 하면 내가 여기에 안 왔을까? 나를 막았다며 원망했겠지. 오빠가 아픈건 오빠 탓이 아닌데 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분노가 매번 방향을 잃었다.
매번 자책과 찝찝함,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뒤엉켜 오빠를 대했다.
내가 오빠를 이해하게 된 건 거진 10년뒤에 내가 공황이 오고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