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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 Ayu Apr 13. 2023

아빠와 나

unconditional love


4주의 한국여행을 마치고 남자친구(이하 "S")가 어제 유럽으로 떠났다. 인천공항에 같이 가서 배웅을 했는데 아쉬운 마음을 참느라 무슨 정신으로 같이 체크인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나저나 공항에서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템플스테이에 함께 했던 한국인여자-스페인남자 커플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와 같은 한국인여자-스페인남자 국제커플이라는 것만으로 신기했는데, 공항에서 또 이렇게 같은 날, 같은 시간 비행으로 마주치다니?! 정말 신기했다.


한국인 여자분 옆에 중년 남성분이 한 분 계셨는데, 여자분 아버님이 배웅을 나온 거라고 하셨다. 다시 슬퍼졌다.




나는 요즘 아빠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아빠한테 서운한 게 쌓였고 아빠는 내가 지금 일을 안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이다.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고 아빠한테 서운한 점을 표현해 봤지만, "그건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지."라는 아빠의 대답은 다시금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어렸을 때 아빠에 대해 남아있는 느낌은 나에게 무관심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10대 전에 아빠가 내 생일에 저녁식사 전에 들어온 기억이 없고, 10대가 되고 입시공부를 하면서는 주말, 공휴일 할 거 없이 아침 7시에 우리를 깨웠기에 알람보다 아빠 목소리가 더 싫었던 때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을 때, 기쁜 마음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빠한테 전화해서 소식을 전했을 때 아빠의 반응은 "너네 학교애들 진짜 공부 못하나 보다. 네가 1등이라니."라는 말이었다.


20대에 아빠를 생각하면 조금 어설프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빠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 시점은 사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아빠가 나를 좋아할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면서 성과를 내는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자연스레 바쁘게 살았다. 조건과 성과가 사랑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아빠가 다시 달라졌다고 느낀 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서 부터이다. 평소처럼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공유하면 "그거 하려면 직장 다니고, 저녁에 퇴근시간에 해라."라고 말하거나, 집 계약의 변동사항에 대해 공유해도 "네 돈으로 알아서 하던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크게 다퉜을 때도 아빠가 나에게 했던 말은 "이게 다 돈 때문이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는 20살 이후로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에서 간간히 "부모님이 지원해 주시는 거야?"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참 생경하다.


아빠는 왜 자꾸 나한테 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이미 금전적인 독립을 했는데 말이야.




S랑 썸 타던 시절, 그를 만나며 가장 새로웠던 내 모습은 그가 지불하는 밥과 커피를 아무런 부채감 없이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연애를 하면서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항상 데이트비용 50대 50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카드내밀기의 줄타기를 했었는데 말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금, 내가 돈을 내려하면 "엥 너 지금 돈 안 벌잖아. 이거 너한테 너무 비싼 거 같아. 그냥 내가 낼 테니 나중에 커피 한 잔 사주라."라고 말하는 그의 배려에 자존심을 세우느라 과소비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S랑 유럽에서 처음 지내보면서 몰랐던 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S가 일어날 때 항상 일어났고, 집안일이 하기 싫어도 그기 일하러 간 사이 빨래나 설거지를 혼자 해놓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여유 시간에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쇼츠를 보다가도 S가 관심을 보이면 빠르게 화면을 끄고 숨긴다는 것이었다.


너의 이런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연애랑은 너무 다른 것 같아. 이런 느낌이 지속된다면 나는 너랑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힘들 것 같아.


S와 연애를 시작한 지 2주쯤 됐을 때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이유는 내가 공유를 너무 안 한다는 것. 뭘 보는지, 뭘 생각하는지, 뭘 느꼈는지. 왜 함께 있는데도 서로 단절된 느낌이 드냐는 것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연애는 다른 책을 읽더라도 어떤 부분이 와닿았는지,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어느 부분이 예뻐서 보고 있는지를 항상 공유하면서 연결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참을 생각해 봤다. 그는 왜 나랑 있을 때 단절됐다는 느낌이 들까? 나는 왜 공유를 하지 않지? 나는 왜 자꾸 눈치를 보지? 나는 왜 자꾸 그의 판단평가를 상상하며 두려워하는 거지?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조건과 성과가 사랑의 필요조건이라 믿으며 무조건적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S보다 1-2시간을 늦게 일어나고, 내가 자는 동안 S는 일을 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끔 귀찮을 때면 그가 먼저 눈치껏 말한다. "내가 설거지할게."

예전 같으면 "아니야. 내가 할게."라고 억지로 말했겟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주라. 나 오늘 좀 게으르네. 나중에 내킬 때 바짝 할게!"라고 말하고 소파에 앉아 유튜브로 나 혼자 산다 팜유세미나를 보면서 혼자 웃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S가 다가와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같이 보자고 말하면 영어자막도 없는 한국예능을 보면서 서로 웃고 공유하며 하나가 되는 일상이 꿈같이 낯설고 새로우며 행복하다.




회계법인을 그만두기 직전 꽤나 큰 금액을 성과급으로 받았다. 시즌에 일만 하느라 월급도 많이 저축했는데 성과급도 두둑해서 부모님께 100만 원씩 드렸다. 통장은 두둑했지만 마음이 고달프던 시절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싶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택시에 몸을 실어 출근하던 시절.


하루는 아빠가 아침에 출근길에 배웅해 주겠다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아빠는 싱글벙글,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내가 보낸 용돈이 너무 기특해서 마을 사람들에 잔뜩 자랑을 했다고 했다.


갑자기 확, 온몸에 열이 올랐고, 숨이 가빠졌고,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 이제 그런 말 저한테 안 하면 안 돼요? 아니, 동네사람들한테 자랑 안 하면 안 돼요? 진짜 이젠 그런 말 들으면 부담감과 압박감 때문에 너무 괴로워요."




아빠에게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이 쏟아졌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소개팅 제안에 "지금 백수"라는 이유로 내가 먼저 소개팅을 거절했던 이유도 이제 알겠다.

나는 왜 지금껏 연애라는 관계에 집착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내가 왜 지금껏 소비로 자존심을 채우려 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나는 왜 지금껏 만났던 남자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그에게 좋은 행동만 하려 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엄마랑 통화를 자주 하지만 얼굴은 한 달 만에 봤다. 엄마는 지금 내가 되게 좋아 보이는지 S에 대해 자주 관심을 보이고, 결혼식에 대해 자주 언급을 한다. 오늘은 엄마에게 솔직히 말했다.


"엄마, 내가 요즘 아빠한테 서운한 거 많은 거 알지. 최근에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그 친구 아버지가 축사를 했는데 말투와 내용에 진심과 애정과 응원이 듬뿍 담겨있더라. 그걸 보는데 너무 부러운 거야. 그래서 그 이후 일주일 내내 되게 서운한 감정이 많이 올라와서 자주 울었다?

내가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아빠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지금의 서운한 감정을 다 푼다고 해도 아빠랑은 이제 데면데면 할 거 같거든. 아빠의 조건에 드는 딸의 모습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아빠를 보면서 데면데면한 심정으로 허울뿐인 결혼식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결혼식을 하게 되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응원과 지지를 받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엄마랑 나는 대화를 나누며 같이 울었다.




“저는 강력한 일을 겪었습니다. 왠지 느낌이 다르네요. 저는 당신에게 낯선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당신과 거리를 두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는 나 자신이 예전의 나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간단한 말은 변명, 회피, 성의 없는 설명보다 더 강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더 나을 때 가족과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립니다. 재합일을 원하는 경우, 당신이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을 주도하고 도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Dark night of the soul, Thomas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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