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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 Ayu Sep 16. 2023

발리에서 살기 위한 조건

그리웠던 그 모습 그대로

긴장과 몽롱함 속에 발리에 도착했다. 우리의 비행은 비엔나-도하(5시간 50분), 도하-발리(10시간 30분)의 비행이었는데, 도하에서의 경유시간이 45분뿐이라 운명을 내걸고 냅다 뛰어 무사히 보딩시간에 기내까지 뛰어들 수 있었다.


나는 국제선의 경우 2시간 이내의 경유시간의 비행은 무조건 거르는데 S는 무슨 배짱으로 올해 초 비엔나-파리 1시간 경유-발렌시아 비행도 놓쳐서 고생해 놓고 또 이런 스릴을 즐기자는 건가.

다른 옵션을 찾아봤지만 비행기값이 수십만 원 차이가 나 결국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고른 티켓이었다. ‘다시 발리에 갈 수 있다면 도하에서 비행기를 놓쳐 하루쯤 카타르 공항에서 노숙쯤이야 감수할 수 있어.’라는 기대감과 함께.



발리에 랜딩 할 때부터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하는 건 곳곳에 주황색 지붕이 보일 때부터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공항으로 향하는 복도부터 느껴지는 습하고 꿉꿉한 동남아 기후냄새에 익숙해질 때쯤, 예약한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오늘 차 많이 막힐 것으로 예상되나요? “


발리에는 교통체증으로 유명한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우리가 머물 우붓 초입도 그중 한 군데이기 때문이다. 장시간 비행도 비행이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우붓에 빨리 도착하고 싶었던 설렘이 더 컸다. 기사는 대답한다.


“아니요. 오늘 갈룽안데이에요. 차들 별로 없을걸요.”


갈룽안데이는 발리 힌두교의 가장 큰 명절로 약 7개월에 한 번씩 돌아온다. 작년 발리여행 때 6월 초 처음 맞이했던 갈룽안데이를 떠올리니 발리에 온 게 실감이 난다.

작년 6월 갈룽안데이


약 1시간 30분 차로 이동 끝에 우붓에 도착했다. 우붓이 위치한 정글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에 익숙한 간판과 풍경들. 현지시간 아침 9시에 체크인을 하러 숙소에 들어가니 주인아저씨가 놀랜다. 아직 방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짐만 맡기고 2시쯤 돌아오라며 우리를 내보냈다.


당황하지 않고 근처 다시 방문하고 싶었던 음식점과 카페에 앉아 쉬려고 했는데, 아차! 오늘 갈룽안데이지… 갈룽안데이의 거리 풍경은 흡사 90년대 우리나라 설날 명절 당일처럼 거의 모든 매장이 문을 닫는다.


이도저도 못하고 길거리를 헤매며 걸어 다니는데, 흠 뭐랄까… 차 안에서 본 풍경은 작년과 똑같아보였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니 낯설고 어색한 것이다.

갑자기 몸에 치일 듯 달려오는 오토바이들, 그리고 그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들은 대부분 금발머리와 기른 수염과 흰 옷을 휘두르며 히피 패션을 뽐내고 있었다.


발리에 도착하기 전 메신저로 현지인 친구에게 한 달가량 지낼 숙소를 구해줄 수 있냐 물어보니 올해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이미 1년 치 계약을 몽땅해서 숙소를 찾아줄 수 없다는 대답을 받았었다.

그리고 눈앞에 지나다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람들. 요가원에 가도 러시아어로 된 안내문이 생긴 걸 보면서  우-러전쟁의 장기화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우붓의 가장 큰 요가원에 있는 러시아어 안내문




한참을 오토바이 소음에 시달리며 걷다가 드디어 체크인을 하고 방을 둘러보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문 없이 어두운 방, 환기가 되지 않아 제습제를 틀어야 한다는 주인아저씨의 설명, 그리고 귀에 들려오기 시작하는 제습제의 소음, 여느 발리니즈 집처럼 천장이 없어 언제 들이닥칠 벌레리스크를 안고 샤워해야 하는 화장실까지.


체크인을 하고 꿉꿉한 침대에 몸을 뉘니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나 왜 다시 발리에 오고 싶었던 거지? 이렇게 불편한데? 기억이 미화됐던 건가?…‘



발리니즈의 가정집 방갈로는 마치 큰 나무의 잎사귀 같다. 나무의 기둥이 차들이 다니는 도로라고 하면 가정집 입구는 나무기둥에서 하나의 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줄기에 자라난 잎사귀들처럼, 하나의 입구와 오토바이 한 대가 다닐 좁은 복도를 공유하며 다섯 내지 여섯 가구가 방갈로 하나씩을 차지하고 지낸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하나의 입구로 들어서 긴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빌라였고, 그런 구조적 특성 덕분에 차도가 미친 듯이 시끄럽다가도 복도를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소음은 잦아들고 풀벌레 소리와 곳곳에 보이지 않는 동물소리들이 들리며 정글 속에 지낸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얘기를 왜 했냐 하면, 혼란한 마음을 안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복도에서 오토바이 하나가 뒤에서 달려오느라 좁은 복도에 사람과 오토바이가 꽉 막혀버렸다. 짜증이 치솟을 찰나, 애처롭게 통로를 피해 준 우리를 지나치는 오토바이를 보니 발리니즈 전통복을 입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현지인 남녀였다. 그들은 수줍게 “헤헤. 쏘-리.”라며 우리를 바라본다.


아, 이게 내가 그리워했던 발리였구나.


그 순간 우붓에 도착 후 느낀 혼란과 짜증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발리니즈 집을 지나칠 때마다 현지인들은 해맑게 우리를 향해 웃어주고 환영하고 있음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부터 바닥을 보며 걸었던 거지?

나는 언제부터 꽉 막힌 콘크리트벽을 소음차단제로 간주하고 지냈던 거지?

나는 언제부터 사소한 불편함을 건건이 수면 위로 올려 불평으로 되새기고 있었던 거지?


아마도 작년 10월 발리를 떠나 한국에 돌아온 이후부터 아니었나.



어디에서든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환영하기.

집 하나, 차 하나, 긴 옷 하나 없이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기.

그리고 사소한 불편함은 미소로 간단히 털어버리기.


이제야 그토록 그리워했던 발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발리에서 지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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