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유 Ayu Sep 19. 2023

나로 살기 위한 조건

조건 너머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

나는 스페인사람인 S와 함께 스페인에 살고 있다. 발리에 오기 전엔 주 3-4회 2시간씩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새로운 언어를 익혀갔지만 갑자기 빠른 어투로 말을 거는 현지인들을 만날 때면 조금 주눅이 들곤 했다. 그래서 영어로 마음껏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발리에 오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발리에 도착한 후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식당으로 향하는 중 한 오토바이가 우리를 가로질러 주차를 하고 헬멧을 벗고 있었다. 발리니즈 여자 한 명, 유럽 남자 한 명. 자세히 보니 S가 발리에 오기 전 보여줬던 S의 친구들인 발리니즈 요가강사 N과 프랑스 남자 B였다.


나도 작년 여행 중 N의 수업을 한 번 들은 적이 있던 터라, 우리는 “어제 막 도착했는데, 이런 우연이…!”라며 반갑게 인사를 했고 그들은 요가수업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러 향하는 중인데 함께하자며 우리를 카페로 이끌었다. 갑작스레 합석하게 된 카페테라스에는 이미 N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두세 명 더 있었고, 그렇게 7명이서 커피를 마시게 됐다.


무리 중 한 여자 C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고, 가볍게 어디서 왔냐는 말에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왔다고 말하니, 그녀는 “와, 나도 발렌시아에서 왔는데!!! 에스파뇰(스페인어로 스페인사람을 말한다)?” 이라며 S를 가리켰다. 나를 둘러싼 S와 C는 갑자기 스페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나는 무언가 부담스러운 기분에 고개만 연신 끄덕이며 커피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C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발렌시아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음… 뭐라고 말해야 하지? 회계사를 그만 둔지도 꽤 됐고 이렇다 소개할 만한 직업이 없다는 생각에 또 마음이 부담스러워졌다. 결국 나는 그녀와 대화 중 커피잔을 테이블에 어설프게 두는 바람에 커피를 바지와 가방에 잔뜩 쏟아버렸고, 그렇게 어설프게 자리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며칠 후 좋아하는 식당 테라스에 앉아 S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걸어가고 있는 C를 마주쳤다. C는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Hola, buenos dias! (안녕, 좋은 아침!) ~~~ 중간 이야기는 내가 못 알아들었으므로 생략~~~ Hasta luego!(나중에 또 봐!)”


하, 또 스페인어라니.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식사를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왜 우냐는 S의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C는 왜 영어도 잘하면서 스페인어로 인사를 하는 거야? 그것도 나는 안 보고 너만 보고 이야기하잖아. 나는 여기서 스페인어로 말하기 싫어. 난 그간 스페인어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스페인어권에서 배제당하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던 거야. C가 하는 스페인어를 들으니 발리에서도 사람들에게 배제당할까 봐 두려워.”


S는 말한다.

“엥? 자기가 보기엔 C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만나서 정말 그런 의도라고 느껴진다면 어울리지 말자. 나도 네가 불편해하는 사람이랑 어울리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발리 우붓에 돌아온다면 꼭 S와 참석하고 싶었던 액티비티가 있었다. Ecstatic dance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수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춤을 추는 수업인데, 무려 프리스타일 댄스이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 되는데 - 소리를 지르거나 뛰거나 요가동작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 어떤 움직임이든 음악과 연결되어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걸 알아차리고 그걸 행한다면, 춤을 추는 동안 황홀함에 빠질 수 있다는 개념이다.


나는 작년에도 참석했던 액티비티라 S와 참여하면 어떨지 기대하며 우붓에 도착하고 처음 돌아오는 일요일 오전 11시 30분 세션에 참여하였다. 세션이 시작되자마자 100명 넘는 사람들이 널찍한 스튜디오를 꽉 채웠고, 창문이 없는 스튜디오는 요가원 너머 초록한 나무와 햇살로 둘러싸여 춤을 추는 사람들의 동작을 쉽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아, 자유롭게 춤을 추기엔 너무 밝은 거 아닌가? 조금 쑥스러운데…’


기대와 다르게 내 몸은 고장 난 듯 잘 움직이지 않았고,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작년처럼 자유롭게 내면과 연결되는 게 쉽지 않았다. ‘나 작년에도 이렇게 뚝딱거렸나?’ 라며 최대한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 빈틈을 노려 자리를 옮기려는 사람들이 내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들은 지나칠 때마다 내 눈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렇게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니 작년에 우붓 어딘가에서 마주쳤던, 소위 말해 얼굴은 아는데 말을 안 해본 사람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그 사람들과 눈 맞춤을 하고 미소를 나누면서 알게 모르게 내 마음에 쌓인 긴장을 마주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판단평가 - 스페인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춤은 얼마나 근사하게 추는지. -에 대한 긴장.


그 순간 오늘 댄스수업 동안 내가 할 일을 알아차렸다. 스튜디오 가장 뒤쪽 구석으로 옮겨서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쌓인 긴장을 내보내기 위해, 가만히 앉아 두려운 마음을 마주하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S는 내 옆에 다가와 내 무릎에 손을 대고 앉아 나를 응원해 주었다. 나를 지지하는 S의 손길을 느끼며 방금 본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과 미소를 다시 마음에 새겼다. 오늘 댄스세션은 방방 뛰거나 화려하게 움직이진 않았지만, 다시 발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하기 위한 준비였다.



며칠 후, N이 가르치는 요가수업에 참여했고, C를 다시 만났다. 혼자만의 두려움 때문에 C를 환영하지 못한 것 같아, 수업 후엔 꼭 먼저 다가가 시간 되면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제안해야겟다고 마음을 먹었다.


‘스페인어가 나와도 당황하지 말고, Hablame despacio.(천천히 말해주세요.) 내지는 Hablamos inglés.(영어로 대화하자)를 말하자.’ 마음에 꼭 새긴 채 말이다.


C와의 대화는 순조롭게 영어로 진행이 되었고, C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나랑 커피 마시러 가는 건 선호하지 않니?” 나는 대답했다. “나도 마침 너랑 커피 마시자고 말하던 참이었어. 가자!”


나와 S와 C는 요가원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S는 자기가 주문을 하고 오겠다며 나에게 찡긋- 힘내라는 눈짓을 보내고 사라져 버렸다. 그때 C는 나에게 말한다.


“지혜, 그거 알아? 너 굉장히 우아하다. 내가 원래 사람들한테 이런 말 안 하는데 그냥 몸의 분위기만으로도 느껴져. 정말 우아해. 네가 걸어갈 때, 요가동작할 때, 말할 때, 인사할 때, 다 느껴져.”


한참 C가 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때, S는 주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둘은 우아함에 얼마나 대단한 가치인지, 옷으로 화장으로 물건으로 치장할 수 없는 본연의 기운이라며 나를 칭찬했다.


“정말 고마워. 하하. 그런데 나 우아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서 정말 쑥스럽네? 하하..”라고 대답하고 우리는 수다를 이어갔다. 그녀의 직업, 스페인사람의 전투성, 발리에서 좋았던 여행지 등등.


신나게 대화하는 C를 보면서 문득 아까 요가 마치고 나에게 ‘커피 마시러 가는 걸 선호하지 않을래?’라고 부정형으로 물어봤던 게 떠올랐다. 아마도 C는 처음 만난 날 스페인어에 대한 부담 때문에 얼어붙은 내 반응이 자기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담함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편한 쪽인 S에게 인사를 했구나.라고 정리가 됐다.



‘내가 슈퍼- 우아하다니!’ 생전 처음 들어본 칭찬에 들뜨게 기분이 좋았던 그날 밤, S와 나는 한창 수다의 장이 열렸다. 나는 C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부터 스페인어에 대한 부담감까지 깨끗하게 인정했다.  


S는 말한다. “그나저나 너 사람들이랑 어울릴 때 성격이 어떤지 파악했어. 아예 아무 말도 안 하거나, 갑자기 꽂혀서 대화를 하면 엄청 순진할 만큼 솔직하게 너에 대해 다 말한다는 거.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런 모습이 좋았던 거야. 정말 사랑스러워.”


나는 그간 나의 두려움을 지키기 위해서 긴장의 벽을 세우고 있었던 것만 같다. 발리에 온 이유는 영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페인이라는 타국에서 살게 되면서 마음속 높이 세운 긴장의 벽을 허물기 충분한,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구나.


눈앞의 지금에 충실하기: 시간과 마음을 내어 눈빛, 미소와 기쁜 말들을 나눌 것.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겠다면 어떤 감정이 나를 막고 있는지 유심히 바라볼 것.


있는 그대로 나로 살기 위한 조건이다.

이전 02화 발리에서 살기 위한 조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