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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 Ayu Sep 20. 2023

너와 살기 위한 조건

감추고 싶은 모습 너머의 자연스러움 인정하기

사실 여기 비밀이 하나 있다. S와 나는 작년 발리여행에서 처음 만났다는 것. 링크에 걸려있는 작년에 쓴 글의 주인공이 지금의 S, 내 남자친구이다.


S가 보내주었던 스페인 발렌시아의 일몰


작년 발리여행을 마치고 스페인과 한국,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서도 우리는 매일 연락을 했다. S는 자기 전 꼬박 음성메시지를 남겼고, 나는 눈을 떠 S의 음성메시지를 들으며 요가원으로 향했다. 나는 그 즘 미래에 대해 자주 불안했고, 무언가 붙잡으려고 새벽요가를 붙잡고 있었다. 매일 S와 통화를 하며, 똑같은 얘기의 반복의 반복… 현실투정을 부리고 있는데 드디어 S가 입을 열었다.


“지혜, 넌 참 인생을 레몬즙 짜듯 산다. 일을 쉴 거면 늦잠도 좀 자고 푹 쉬어야 앞으로 뭘 하고 싶을지 생각이 나지, 매일매일 체력을 다 소진하고 있는데 마음의 여유가 있겠어? 스페인에 놀러 와. 내가 너를 위한 특별한 워크숍을 제공할 게. 워크숍 이름은 음…

Art of living?”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랬나? 처음에는 스페인에 오라는 둥, 자기가 연말에 서울에 가겠다는 둥의 말이 터무니없이 들렸는데 매일 목소리를 듣고 화상통화를 하니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카메라만 붙잡고 있느니 직접 만나 결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하곤 유럽여행을 할 비행기 티켓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 너 겨울 휴가가 언제 시작된다고?
S: 네가 스페인에 온다면 당장 내일부터!

그렇게 연말에 난 스페인으로 떠났고, 길고 긴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좌석 앞 모니터를 향해 얼마나 가야 하나, 지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국과 스페인이 그렇게 멀더라. 그간 손만 뻗어 핸드폰으로 전한 마음은 길어야 5분 안에 메시지로든 전화로든 응답을 받았는데, 물리적으로 20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 거리였다니! 3개월 간 S랑 연락하면서 처음으로 우리가 참 멀리 산다는 걸 실감했던 날이었다.


S와 함께한 스페인여행은 내 인생의 많은 걸 바꾸고 있었다. 그는 남자친구가 되었고, 나는 워킹홀리데이비자를 통해 스페인에 1년간 살 계획을 하고 있었고, 내가 한국에 돌아가는 3월에 S도 함께 한국에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올해 상반기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자의 고향도 함께 방문하고, 여행계획에 큰 의견차이 없이 즐길 수 있어서 문화차이취향같음으로 이겨내는 와중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낯선 타지에서 향수 어린 감정을 느낀다는 것


그래서인지 S는 한국에 있을 때 꽤나 자주 발리 이야기를 했고, 결국 올해 8월에 함께 발리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둘 다 발리를 익숙하고 안전한 공간이라 여기니 발리에서 함께 있을 땐 둘 다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누군가 지금 발리에 함께오니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야 지금껏 한국인과 연애하듯
진짜연애하는 기분이에요.


그간 스페인에서나 한국에서나 취향이 같아서 여행이 순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스페인을 모르니 스페인에서 S의 의견을 따랐던 거고, S는 한국을 모르니 나의 추천에 따라왔을 뿐이었다.

발리 우붓에 도착한 이후로 뭘 먹을지, 어떤 액티비티를 할지 등 이야기를 할 때면 의견차이로 여행계획이 평소처럼 순탄치가 않았다.


발리는 인도가 매우 좁고 울퉁불퉁해서 두 명이 나란히 걷기가 참 불편하다. 걸으면서 나를 툭툭 쳐서 말을 걸거나,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를 밀고 있는 S의 행동에 결국 나는 자주 “하지 마”를 외쳤다. S는 도대체 아치마는 무슨 뜻이냐며 구글에 “achima korean meaning”을 검색해보질 않나, 길 가다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면 당장이라도 붙잡고 물어볼 기세였다. 결국 뜻을 알려주었는데 설명하면서 참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한없이 작아지는 나의 인내심에 기름칠을 했던 건, 팬데믹이 온전히 끝나고 처음 맞이하는 극성수기라 어딜 가도 사람이 폭발할 듯 많았고 숙소비용이 작년대비 3-5배는 기본으로 올라있던 우붓의 상황이었다. 작년과 똑같은 전략으로 여행초반 1주일만 예약을 해오고, 발품 팔면서 숙소를 구하려 했는데, 어딜 가든 “죄송합니다. 방이 없어요.”라는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숙소를 보는 기준은 정말 달랐다. 나는 적당한 가격에, 창문이 커서 방에 빛이 잘 들고, 청결해서 벌레가 없으면 좋겠는 게 우선이었고, S의 기준은 1달 동안 한 숙소에 머물면서, 숙소 정원 및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게 우선순위였다.


매일 10번씩 호텔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고, 걷다가 보이는 괜찮은 숙소를 다 찾아본 것 같다. 매일같이 카페에 앉아 호텔예약어플을 뒤지며 몇 천만 원짜리 숙소 밖에 안 남은걸 보고 살짝 우붓에 정이 떨어지려는 찰나, 드디어 우리의 접점에 부합하는 숙소를 찾은 것 같았다. S가 지내보고 싶다던 몽키포레스트 뒤쪽 숨겨진 지역, 뉴쿠닝에 위치한 숙소였는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평점도 좋고, 주변 정글이나 정원도 수영장도 참 예뻤다.


드디어 우리의 휴가는 시작되는가. 기대하며 예약을 누르려는 순간, S가 말한다. “아, 나 근데 원숭이 무서워하는데, 거기 원숭이 많은 동네 아니야?”


“원숭이 포비아가 있으면 뉴쿠닝에 지낼 생각을 말았어야지…!! 그럼 여기에서 또 못 지내겠네. 아…” 하며 울상이 된 내 얼굴을 보며 S는 대답한다.

“지낼 수는 있지, 그런데 즐기지 못할 뿐이지.”


 “Yes or no?”


그래서 예약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라고 공격적으로 묻다가 결국 참아왔던 인내심이 폭발했다. S 때문이 아니라 극성수기에 쫓기듯 숙소를 찾아야 하는 상황 탓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를 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결국 카페에서 대차게 화를 내고 나는 혼자 숙소에 가서 열을 좀 식힐 테니 친구들이랑 점심을 먹든 알아서 놀고 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박치고 일어났다.


숙소로 갈 거면 나도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함께 가겠다는 S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단숨에 집에 와버렸다.


가만히 테라스에 앉아 감정이 가라앉고 보니, 나의 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어떤 상황이든 순식간에 좋고 나쁨으로 라벨링을 붙이는 것, 그리고 나쁘다고 판단되는 감정은 절대 내보이지 않고 억누르고 좋은 감정만을 표현하는 것, 그러다가 나쁜 감정이 마음속에 꾹꾹 쌓여 터져 버리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화 또는 눈물이 분출되는 것.


씁쓸한 마음을 충분히 곱씹어 소화시킬 즈음, S가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괜찮아진 마음으로 반갑게 S를 맞이했고, 함께 일몰이나 볼 겸 논밭뷰로 길을 나섰다.


그날 저녁, 나는 고해성사와 신세한탄 그 사이를 오가며 S에게 내 성격의 못난 면을 터놓았다. 머리로 아는데, 그 순식간에 좋고 나쁨을 가려서 나쁜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쏙 눌러버리는 과정이 너무 빨라서 의식할 수가 없어 답답하다고.


S는 대답한다.

물론 오늘 네가 화를 내는 걸 보면서 대단한 성깔이다 싶긴 했지만, 오히려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그게 더 불편하더라. 혹시 괜찮은 척하는 건가? 의심부터 들더라고.

나는 불 같이 화내는 것보다 오히려 괜찮은 척, 좋은 척 연기하면서 만나는 연애가 더 하기 싫어.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큰 용기고 발전이야. 그렇게 하나씩 알아가면 되지.


S의 대답은 여느 때처럼 마음이 위로가 됐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자리를 옮겼고 기분이 풀린 채 평소처럼 대화를 하며 밥을 먹었다.


S는 말한다. “그나저나 숙소는 어쩌나… 이번 발리여행이 이렇게 순탄치 않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여행 마치고 친구가 발리여행 어땠냐 하면 어떻게 말할래?”


나: Um… it was very beautiful.
Because I showed naturally the part of my bitchness. (정말 아름다웠어. 왜냐하면 내 안에 못된 면을 스스럼없이 보여줬거든.)

S: Hahaha that’s my girl!!!!


익숙한 공간이라 기대한 발리여행,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익숙지 못한 감정을 다루지 못해 생긴 사건으로 또 하나 깨닫는다.


내가 허락하지 못했던 내 모습까지 드러내고 인정받을 용기.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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