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수영이 아니라 서핑
내가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요가를 취미로 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리액션은 "와 유연하겠다!" 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대답에 뭐라고 응해야할지 머뭇거리게 되었다.
다양한 자세의 요가를 하다보면 개인의 타고난 체형과 굳어진 생활습관 등의 차이로 인하여 "절대적"으로 어려운 자세는 없으며 어려운 자세라는 것도 모두 "상대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유연하다는 표현도 상대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져서 '누구보단 유연하지만 누구보단 뻣뻣한걸, 이 자세는 잘 하지만 저 자세는 어려운걸..' 이런 복잡한 생각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런 요가의 특징을 받아들인 덕분에 좋은 점이 있다. 한 공간에서 같이 요가수련하는 사람들을 100m 달리기처럼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길 위에서 묵묵히 나아가기에 서로의 여정을 응원해주는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는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께 질문하는 시간에 어떤 학생이 "저는 이 자세가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하면 성공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은 "꽃봉오리가 활짝 피지 않았다고해서 그 꽃을 억지로 활짝 피우게끔 할 수 있나요?" 였다. 그저 각자의 속도에 맞게 꽃이 피어나는 것 뿐... 절대적으로 만개해야할 때가 있는건 아니라는 것!
한 때 회사생활에 지쳐서 퇴사한 삶을 꿈꾼 적이 있다. 주변에 프리랜서로 생활하는 친구를 보면서 많이 부러웠고 프리랜서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환상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그쯤 프리랜서 친구와 우리 요가선생님이랑 셋이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친구는 나에게 퇴사를 꿈꾸면서 왜 그만두지 못하는지 물었다. 나에겐 너무나 어려운 결정을 이렇게 쉽게 물어보는 이 천진난만한 친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복잡미묘한 감정에 조심스럽게 찾아낸 비유는 이별이었다.
연애로 비유하자면 이별이 완료되는 시점은 이별선언한 날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다 사라지는 때라고 생각하기에 그 시기를 견디고 기다리는 것처럼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퇴사선언 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는 날을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마음의 준비라 하면, 퇴사 후 생활비 정도의 여유가 있는지, 사라진 소속감에 외롭진 않을지 등 직장인보다 만족스러운 백수의 삶이 될 수 있을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여전히 이해를 못한 표정이었지만, 옆에서 듣고있던 선생님은 어떤 때에는 그저 기다리는 것이 전부인 때도 있다고, 예전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일관성있는 말씀을 하셨다.
이 날 이후로 3개월 후 나는 정말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고, 퇴사를 꿈꾸며 기다린 그 시기 덕분에 어떠한 불안감도 없이 온전한 휴식을 맞이할 수 있었다.
몇일 전 후배회계사로와 이직과 진로 고민을 나누던 중, 그 후배가 나한테 앞으로의 커리어 계획에 대해 물어왔다. 휴식 기간이 길어지면서 슬슬 일할 시기가 오는 것 같다고 느끼던 시기에 이런 질문을 받으니, 지난 번 퇴사를 결심하던 시기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그 때와 같았다. 명확히 "어떤 일이 하고싶다!"라는 환상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지금도 그저 "나의 다음 환상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고 그게 금방 올 거라고 믿는다는 대답만 할 수 있었다.
몇일 전 우연히 장기하가 출연한 유퀴즈를 보게 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장기하는 "인생이란 파도"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로 무언가를 이룬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은 파도 위에 누워 몸을 맡긴 채 유영하는 것, 어쩌면 인생은 수영이 아니라 어쩌다 만난 파도의 연속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기하가 말하는 인생이 우리 요가선생님이 우리에게 주었던 대답과 똑같이 들렸다.
어려운 요가 자세도 내 의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다보면 성공하게 되는 것이고, 내 인생의 여러가지 선택도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고가는 하나의 파도의 한 지점일 뿐이고 우리는 그 상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서야 인도의 오래된 경전 아슈타바크라 기타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삶의 파도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너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