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유 Ayu Feb 15. 2022

우리 각자의 데미안을 찾아서

데미안을 읽고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가정에서 둘째로 자랐다. 첫째인 언니와 귀여운 막둥이 남동생 사이에서 비교적 독립적으로 자랐다. 초등학생 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부모님의 사랑이 고팠다. 언니랑 싸우면 언니한테 대들었다고 혼났고 동생이랑 싸우면 동생 돌보지 않았다고 혼나서 속상했다. 언니가 꿀단지를 깨트리고, 동생이 단소로 안방 벽을 찍어놨을 때에도 엄마아빠는 항상 나를 먼저 의심하고 혼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성적통지표를 받고 “우수한”이라는 단어가 스스로 참 뿌듯해서 한걸음에 집에 달려갔지만, 부모님은 중학생이었던 언니가 받은 성적표만 들여다보며 언니를 칭찬했었고 나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림그리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어 강남구청장 수상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었다. 그 날 엄마는 나한테 평소보다 훨씬 따뜻했다, 어쩌면 엄마는 똑같았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던 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는 ‘아, 엄마는 내가 무언가 성과를 내면 관심을 주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첫 시험에서 전교1등을 했다. 우리가족 뿐만 아니라 전교생과 전교과선생님까지 모두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내가 부담을 가지지 않고 교과생활을 이어나가길 바라셨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칭찬과 관심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맡은 일은 정말 열심히 했고 중학교 3년동안 반1등을 놓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하루는 아침에 추워서 블라우스 대신 목폴라를 입고 등교를 했는데 넥타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문에서 선도부 선생님께 지적을 받고 벌을 섰다. ‘목폴라에 넥타이를 할 순 없잖아, 그냥 블라우스를 입으라는건가?’ 너무너무 억울했다! 사실 억울함보다는 창피했다. ‘애들이 등교하면서 벌 서는 나를 다 보겠지?…’ 외부의 시선만을 의식했던 것 같다. 그 날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수업시간 내내 울기만 했던 것 같다. 이 땐 몰랐지만 이 날이 시작이었다. 이 날 이후로 고등학교를 이어 대학생 때까지 한달에 한 번은 주기적으로 이유없이 하루종일 눈물이 났다. 그런 날엔 재빨리 집으로 피신해 혼자 울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냥 단순한 pms라고, 호르몬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리고 흔한 한국의 대학생처럼 진로를 걱정하던 3학년 때, 비상경계열이었지만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왜 회계사가 되었어요?” 라는 질문에는 “돈 많이 벌고 싶어서요.”가 나의 대답의 전부일만큼 그저 성공에 대한 욕심이 수험생활의 원동력이었다. 1년동안 1차 시험을 준비하고, 이어서 바로 4개월동안 2차 시험을 준비해야하는 기나긴 수험생활 중 2차시험을 2달 앞두고 너무나 지쳐버린 나는 학교에서 공부하며 매일 울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만난 친구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껀데 같이 갈래?” 라는 질문에도 울음이 터졌고, 엄마가 전화만 와도 와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우는 모습을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한테 자주 보여주는 것 자체가 너무 쪽팔려서… 나는 1여년을 함께한 친구들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학교에서 짐을 싸서 집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남은 2달을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고, 그 해에 2차까지 최종 합격하면서 다행히도 수험생활을 마쳤다.


 시험이 끝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공허했다. 성공하면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똑같았다. 아니,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울던 울음이 더 잦아졌다. 밤마다 울상인 나를 보면서 언니는 진지하게 심리상담을 권했고, 처음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심리상담 과정 속 하나의 발견이 있었다면, 밖에서 눈물이 터지면 내가 어쩔 줄 모르는 공황상태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엄마와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울면 엄마는 항상 “뚝 그쳐! 창피하게 밖에서 울고그래.”라고 말했다. 엄마는 한 번도 왜 우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 그래서 나에게 우는건 창피하고 밖에서 하면 안되는 행동이 되었구나.. 라고 정리가 됐다. 이유를 알게된 그 날도 한참 울면서 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또 말했다. “너 밖에서부터 이러고 왔니? 창피하니까 그만 울어.” 나는 처음으로 대답을 했다. “엄마는 한 번도 왜 나한테 왜 우냐고 이유를 묻지 않아? 이유없이 자꾸 눈물이 나는데 엄마는 맨날 울지 말라고만 하잖아.” 라고 대답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직장에 들어가면서 요가를 시작했다. 밖에서 완벽해보이고 싶어 긴장이 많은 나에게 요가하는 시간은 정말 달콤했고 정말 딱 맞는 운동이자 수련이었다. 온 몸이 이완되고 나면 마음도 이완되고, 요가수업을 마치고 집에가는 길에는 눈도 시야도 맑았고 바깥 소리도 생생했고 바람도 피부에 더 잘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요가도 매 수업이 달콤하지는 않았다. 유난히 외부 시선을 신경을 많이 쓰고 승부욕이 많은 나는 난이도가 높은 요가수업을 하는 날(ex. 빈야사, 아쉬탕가…)은 간간히 울었다. 이유는 짜증나서.. 내가 못하는게 짜증나서 울었다. 울면서도 창피하지만 이 악물고 수업을 끝까지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2019년 3월 더 깊이 있는 요가를 하고 싶어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과 수련하면서도 난 역시나 수련 중 간간히 울었고, 그 때마다 선생님은 이유를 묻지 않았고 정말 쿨하게 “just let it out.” 이라고만 말씀하셨다. 선생님과 함께 한지 6개월쯤 됐을 때,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여름이었고 체력이 지쳐가던 시기에 그저 완벽한 요가를 하고 싶은 마음만 앞섰던 나는 내가 못하는 자세에서 또 눈물이 터졌다. 그 시기엔 1주일 정도 눈물이 연일 터졌고 토요일 수업 때는 울음이 그치질 않아서 수련을 다 마치지 못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엔 요가수업을 마치고 다같이 동그랗게 원모양으로 앉아 명상과 이야기 하는 시간을 1시간씩 가졌었다. 선생님은 중간에 뛰쳐나간 나를 “잡으러” 탈의실에 들어오셨고, 짐을 싸던 나에게 어디가냐고, 정말 무서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상 수업에 다시 들어오라고 하셨다. 창피한 마음을 가득 안고 들어간 수련장에 선생님은 나를 바로 옆으로 부르셨고, 같이 수련하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가를 하는 도중 갑자기 큰 감정에 압도되어 눈물이 나는 순간이 생기는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개개인마다 자기와 연결되는 수련이라는 여정 속에서 이러한 현상을 우리 서로 이해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며 한 시간 내내 내 손을 꼭 잡은 채 수업을 하셨다.


 선생님 손은 정말 따뜻했다. 그리고 처음이었다. 밖에서 우는 모습이 창피한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허락받은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 후에도 나는 요가 중 간간히 울었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고, 그저 손 한 번 꼭 잡아주거나 포옹을 해주는 따뜻한 응원만 있었다. 그리고 나도 경험해본 일이었기에 누군가 그런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는 요가수련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짐을 싸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평소에 내가 정말 둔하고 무던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진짜 예민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런 예민한 감각을 자꾸 “둔하다”고 무시해버려서 예민한 반응 하나하나가 쌓이다가 한 번에 뭉쳐서 눈물로 나오는건 아닐까? 진짜 내 마음 좀 알아달라고 내면에서 보내는 일종의 “신호”가 아닐까…?

 십수년만에 주기적으로 터지는 눈물의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 그 이후로 눈물이 나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1달이 2달이 되고, 6개월이 되고 1년이 됐고 점점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생긴 인정욕구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살아가게 만들었다. ‘무시해도 사랑만 받으면 괜찮아!’ 라는 마음이 점점 쌓이다가 주기적으로 눈물로 해소했구나.


 나에게 나의 진정한 본성을 찾게 해주는 데미안은 무엇일까? 심리상담 선생님? 요가선생님? 아니다. 눈물, 그 자체가 데미안이었다. 내 안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무시했을 때, 나에게는 눈물이라는 신호가 있었다. 그리고이 눈물의 이유를 찾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내면을 탐색할 수 있었다. 우는게 싫어서 찾아간 심리상담도, 우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 받았던 요가선생님과의 경험도 결국 내가 울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니까.

 그리고 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었다. 항상 밝고 완벽한 모습(=허용된 것)과 숨기고 싶었던 우는 모습(=감추고 싶은 것). 나에게 눈물은 피스토리우스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데미안을 만들어냈다.

작가의 이전글 번아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