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6. 덴마크 D-1
긴 여행길에 올랐다. 아직은 낯익은 풍경과 언어 때문인지 실감이 나진 않았다. 그저 손톱을 깎지 못하고 온 것이 신경 쓰일 뿐.
흔들리는 시외버스 안에서 영화 <동주>를 재생시켜두고 멀미 때문에 귀로만 들었다. 강하늘 배우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윤동주의 시귀가 머릿속에 울린다.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육첩방은 남의 나라.
나도 시를 쓰게 될까. 내 언어를 사랑하게 될까.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문장을 잃지 않으려 가만가만 되뇌었다. 내 언어를 사랑하게 될까…… 멀리 뾰족뾰족 솟은 능선을 눈으로 그려보며 내가 가진 언어를 떠올려본다. 산, 능선, 고개, 언덕, 둔덕, 중턱, 내가 가진 것이 겨우 이뿐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논과 밭을 하염없이 보는 게 너무 좋다.
인천공항, 출국 11시간 전.
글을 쓰면서 사는 삶은-그중에서도 이야기를 지으며 사는 일은- 꽤 괜찮은 점이 많다. 특히 불시에 맞닥뜨리는 돌발상황에서도 낙담하는 시간은 짧게, 이후 비교적 쉽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 순간을 즐기기까지도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추방되는 상황에서조차 언젠가 이 상황을 써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태연히(?) 상황에 순응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11시간 남은 출국을 기다리며 인천공항 로비 의자에 태평히 누워 나는 그 구절을 읽으며 맞아맞아, 맞장구치며 그 생각을 기록했다.
모스크바, 여전히 5월 6일
무박 하루가 지나고 있다. 한국은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고 모스크바는 오후 8시 40분을 넘기고 있었다.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공항 로비의 의자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비행기에 올라 마취가 덜 깬 사람마냥 기절과 혼몽을 오가며 주는 밥과 음료를 받아먹다 모스크바에 내렸다. 종아리는 퉁퉁 부어있고 야금야금 음식물을 채운 보따리 같은 아랫배가 땡겼다.
환승 터미널을 걷는 동안 이제 진짜 떠나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9시간에 걸친 비행기 속 세계는 무언가 달라졌음을 보여주기엔 너무 익숙한 풍경(한국인 단체 여행객들은 소위 관광버스식 소란을 9시간 내내 들려주었다)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비로소, 다른 세계였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생김새들만 보아도, 쉽사리 읽을 수조차 없는 안내판의 언어도. 십분쯤 걷자 이제야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실감이 났다. 내 눈에 비친 저들이 낯선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는 내가 이방인인 것이다. 그게 어쩐지 이상한 편안함을 불러 일으켰다. 세상은 나와는 무관하게 그러니까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