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08 삼쇠섬 30일차(덴마크34일차)
나는 지금 살아내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떠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또 기질이 발동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떠나온 거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는데도 어쩐지 자꾸 무언가를 채우려 아등바등하게 된다. 식당에서는 요리하는 법을, 거리에서는 낯선 풍경과 우리와는 다를 것 같은 생활 방식을 찾으려 한다. 진짜 나를 위해서보다는 돌아가서 살아가야 할 길을 위해서. 이 여행의 결말이 내 삶에 뭔가 큰 영양분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그러니까 나 스스로가 자꾸 나를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오늘은 한 달여간 생활하면서도 잘 모르고 있던 양조장을 스티니에게 구경시켜달라고 했다. 단체 손님들이 오면 맥주를 설명하고 양조장 투어를 해주는데 온통 덴마크어로 진행되는 통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넌지시 양조장을 봐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쇠얀과 함께 돌아보면서 설명을 해주겠다고 했다.
양조장은 식당 2층 다락 같은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장비와 드럼통들이 즐비하고 풀어서 씻어놓은 나사와 도구들을 보니 일흔을 바라보는 부부 둘이서 하기에는 역시나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과 밭을 오가며 일하며 지켜본 킴과 스티니네 생활은 생각보다 여유라곤 없었다. 밭과 농장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고 킴은 작물뿐만 아니라 카페와 농장에서 쓰이는 간단한 물건들도 직접 만들고 있었다. 더불어 양조장과 13가지 맥주 로고도 직접 다 디자인하는 거라고 했다. 스티니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식당은 손님을 제외하더라도 소시지며 고기류, 여러 식자재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밭에서 나는 작물과 고기류는 직접 생산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더불어 살림살이며 우퍼들 관리에 식당 운영이며, 여러모로 신경 쓰는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종일 지켜본 결과 한 끼도 제대로 앉아서 식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퍼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가끔 빨래나 장 본 것들을 가지고 하우스에 왔을 때 식사했냐고 물으면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난 저녁을 아주 늦게 먹어”였다. 식당에서는 “일하는 동안에는 식사하지 않는다”였고.
그러다 보면 가끔 의문이 든다. 스티니네는 더 이상 키워내야 하는 자식들도 없고 집이며 카페나 농장의 상황으로 봤을 때 결코 경제적으로 힘든 집도 아니다. 거기다 이곳의 일반적인 근무 시간을 보더라도 스티니네는 조금 과하게 일하는 편이다. 대부분 식당이나 카페는 주말에는 단축 근무를 하고 일요일에는 거의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는데 스티니네 카페는 일주일 내 휴무가 하루도 없고 오픈 시간도 다른 카페들보다 길다. 물론 주 수입원이 여름 한 철 장사로 겨우내 지내야 하는 관광지 특성 탓이겠지만 스티니네 양조장 맥주는 섬 전체적으로 납품하고 있기에 노부부 둘이서 먹고 살기에 부족할 것 같진 않았다. 이곳은 자신의 행복과 여유가 가장 중요한 곳이 아니었던가? 이곳 사람들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킴과 스티니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 걸까? 이들을 지켜보며, 덩달아 함께 바빠지는 우퍼들의 상황을 견디며 이곳을 떠나오기 전 상상했던 여러 기대들이 조금씩 어긋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삶은 결국 비슷한 모양이라고.
저녁에는 스티니가 우퍼들이 주문한 식량들을 갖고 하우스에 왔다. 쇠얀과 둘이 생활하던 2주간과 지금의 상황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스티니의 태도는 묘하게 변했다. 사람이 늘어난 만큼 필요한 음식은 당연히 늘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 상황을 어쩐지 탐탁잖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먹는 것 가지고 자꾸 쪼잔하게 나왔다. 우유나 소시지 같은 것들이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가 얻으러 가면 자꾸 한 개나 두 개씩만 주었다. 사람이 몇 명인데. 그러면 당연히 새로 얻어온 것은 금방 바닥나고 얼마 안 가 또 얻으러 가야 했다. 그럼 마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며 “벌써 다 먹었다고?” 하는 거였다. 자주 음식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과 돌아오는 반응에 우리는 점점 눈치를 보게 됐다. 우리의 노동은 바로 그 음식에 해당하는 것인데도 우린 정당한 요구를 하면서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퍼들은 모여 앉으면 자주 이런 상황을 성토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그 불편한 상황에 스티니가 쐐기를 박았다. 내가 씻고 있는 사이 스티니는 우유 5통과 요거트 5통을 사 들고 왔다. 우유와 요거트는 우퍼들이 먹는 음식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 많이 소진되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모두 간단하게 뮤슬리를 우유나 요거트에 말아 먹고, 일하고 돌아오면 지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우유와 요거트에 과일과 빵을 곁들여 먹었다. 우퍼들은 총 6명. 사실 우유 5통은 삼사일이면 동이 난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스티니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잔뜩 사 온 우유와 요거트를 내려놓으며 우퍼들을 향해 외쳤다. “이건 이 주 동안 먹어야 해. 그 전에는 더 못 줘.” 이 말만으로도 다들 어리벙벙해졌는데 끝내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스티니는 떠났다. “그리고 우유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스티니가 떠난 뒤 씻고 나온 내게 히라씨가 그 말을 전하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비싼 고기류는 잘 먹지 않았고 채소나 우유를 좋아했는데 그것들은 이곳에서 제공하는 음식 중 가장 저렴하고 기본적인 것이었는데도 눈치 보며 얻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루에 다섯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관광객이 몰려드는 지금, 우리가 보내는 다섯 시간은 그 배의 시간과도 맞먹는 노동의 강도를 갖고 있는데도 우리는 돈 대신 받는 음식도 눈치 보며 먹어야 하는 것이다. 황당해하는 나와 히라씨를 보며 쇠얀은 그게 스티니도 어쩔 수 없는 자영업자이기 때문이라며 달랬다. 어쨌든 그 사람은 계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며.
이렇게 경험하고서야 느끼게 된 우퍼의 딜레마에 관해서 우린 이야기를 나눴다. 간단한 노동과 머무를 수 있는 잠자리와 먹거리가 해결된다는 것은 말로만 들었을 때는 아주 달콤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은 조금 달랐다. 정당한 요구지만 과연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고, 어쨌든 자꾸 요구를 해야 얻을 수 있는 상황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자꾸 손을 내미는 것은 자꾸 위축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스티니가 남기고 간 음식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티니가 사다 준 사과와 바나나에는 할인된 가격이 빨간 스티커로 붙어 있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지나고 있는 중인 것들이었다. 노동과 재화의 물물교환은 과연 어디까지가 ‘적정한’ 수준일 수 있는 걸까. 직접적인 먹거리와 잠자리 대신 그것들로 바꿀 수 있는 ‘돈’이라는 이름의 무언가에 익숙해진 오늘날, 내 노동이 얼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점점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곳과 전혀 다른 문화와 풍경을 가진 이곳에서 나는 확실히 특별한 여행을 하는 중인 게 분명했다. 잠시 만끽하는 화려하고 낯선 풍경과 비싼 관광지 음식이 아닌 천천히 음미하는 소박하고 다양한 풍경을 통해 자연스레 삶 속에 녹아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떠오르고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잠시, 결국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은 내가 지나온-지나고 있는 삶 자체였다. 나는 지금 살아내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