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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Dec 09. 2019

나를 견뎌내는 일

19.06.10 삼쇠섬 32일차(덴마크36일차)

하지만 지금, 내가 살아내야 하는 것은 이어폰을 꽂지 않은 쪽의 세상이다. 




오랜만에 밭에 나갔다. 궂은 날씨에 빗방울까지 떨어졌지만 식당에 인원이 많았던 탓인지 종일 밭에서 일할 수 

있었다. 춥긴 했지만 비를 맞으며 잡초를 뽑는 것도 꽤 나쁘지 않았다. 빗방울이 잎이며 내 어깨에 토독토독 떨어지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여기 온 뒤로는 비 오는 날도 평온하게 보내고 있다.




오늘은 밭일을 하는 동안 오이디푸스 낭독을 들었다. 비평 공부를 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숱하게 들어왔지만 원문을 읽어보긴 처음이다. 한국식으로 말해보자면 사극 톤인 그리스 비극 어투의 문장들이 생소했지만 이내 책이 아닌 낭독으로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건 ‘극’이고 문장으로 옮겨놓아서는 그 맛이 제대로 살 수가 없으니 책으로 읽었다면 분명 지루해서 금방 덮어버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음성으로, 적절한 배경 음악과 분절된 장으로 들으니 극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감동이 밀려왔다.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 한 인간의 비극 서사를 곱씹으며 잡초를 뽑았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은 무엇인가. 자신의 뿌리인 부모를 죽이고, 범하고, 끝내 자신까지 처단한 인간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결코 덴마크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갖고 떠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곳의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고, 내가 발 딛고 있는 곳보다는 무언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삶은 굴러가고 사람은 계산하고 오해한다. 떠나온 지 한 달, 여기서도 나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




오후에는 쇠얀과 영화 <살아남은 아이>를 보며 쉬었다. 영화는 묵직했고 감정을 쉽게 결정짓지 못한 채 끝났다. 완전히 악한 사람은 없으며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때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선하기도, 누군가에게는 참혹하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혹은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미 섞여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이어폰을 꽂지 않은 한쪽 귀로 낯선 언어들이 들려왔다. 이어폰에서는 내가 쓰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낯설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살아내야 하는 것은 이어폰을 꽂지 않은 쪽의 세상이다. 영화 속 세상이 아무리 익숙하더라도 지금 내게 그것은 저 먼 곳의 가상일 뿐이다. 영화에 몰입하면서도 한쪽 귀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동안 히라씨가 저녁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예상치 않게 이르게 떠나게 됐는데 지내는 동안 고마웠다며 손수 식사를 차려주었다. 고추장 양념의 제육 볶음과 채소, 김자반과 따뜻한 쌀밥을 한 상 차려놓고 셋이 둘러앉으니 정말 한국인 것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 온 뒤로 단 한 번도 빵과 소시지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한국 음식이 그리웠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셋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히라씨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나와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근무 시간대가 다르거나 한 탓에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히라씨와는 눈만 마주쳐도 편안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내 마음 한 구석에는 히라씨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에게 어떤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상태가 어쩐지 그랬다. 조금 위축되어 있고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 살아오는 동안에는 마치 유연한 사람인 척 연기를 해왔던 것일지도. 잘 상처받지 않는 척,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척, 배려하는 척, 괜찮은 척.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온통 가면으로 포장해왔던 것만 같다. 나는 할 말은 해, 감정 표현에 솔직해, 예민한 편이지만 두루두루 잘 지내. 솔직한 척, 자신을 잘 아는 척, 쿨한 척. 하지만 나조차도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온 뒤 내가 가장 놀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애써 감춰온 내 모습들을 나는 여기서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생각보다 작은 일에 연연하는 사람이고 잘 상처받고 감정에 심하게 휘둘리는 사람이다. 관심을 받고 싶지만 주목받고 싶진 않은 사람이고 뭐든 잘 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강박이 심한 사람이다. 여유를 잘 갖지 못하는 사람인데 또 그 상황을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무대에 올라가고 싶진 않지만 모두들 조용히 내게 귀 기울여 주었으면 하고 내가 상황을 이끌어 가는 걸 힘겨워하지만 나를 잊지는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다. 생각보다 진짜 깊은 곳에 있는 속마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말로 뱉는 것과 뱉지 않은 것들에 거리가 깊다.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의 감정 표현, 행동 하나하나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일으키는 곳에서 나는 너무도 낯선 나를 만나고 있었다. 특히 쇠얀과 밀착된 관계 속에서 나는 쇠얀을 통해 나를 보게 됐다. 감정이 예민해지는 순간이면 그 누구도 아닌 나는 나와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은 이해할 수 없는 건 타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시시각각 무참히 흔들리고 변하는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지도.

나는 아직 나에 대해 알아가야 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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