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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Dec 10. 2019

산책

19.06.14. 삼쇠섬 36일차(덴마크40일차)

 이 섬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 호숫가가 생각날 것이다.




Samsø Bryghus에서의 마지막 근무를 마쳤다. 식당은 한가로웠고 에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일했다. 저녁에는 스티니와 우퍼들이 한 데 모여 굿바이 파티를 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또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김밥을 준비했다. 김과 참기름은 아시안 마트에서 사온 것이 있었고 근처 마트에서 참치와 마요네즈를 사와 참치 김밥을 만들기로 했다. 하루 전에 단무지를 대신해 콜라비를 식초에 절여두었는데 새콤하게 맛이 잘 들었다. 고소한 냄새와 모양에 베티는 흥미로운 얼굴로 만드는 내내 옆에 꼭 붙어서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한 입 맛보고는 감탄을 내뱉으며 독일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김밥을 만들어줄 거라며 재료와 만드는 방법을 꼼꼼히 메모했다. 쇠얀과 가끔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면 강한 향 때문인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는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김밥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아이를 소풍 보낼 엄마가 된 것처럼 흐뭇해졌다.



어느새 날씨가 활짝 갰고 우리는 스티니네 집 뒤뜰에 모였다. 스티니는 불을 피우자고 말했고 캠프파이어 같은 것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Snobrød’라는 것을 만들어 먹는 자리였다. 쉽게 말하면 긴 막대기에 빵 반죽을 돌돌 감아 불에 구워 먹는 음식이었다. 반죽은 아주 천천히 익거나 쉽게 타버려서 오래오래 적당한 거리에서 구워야 했다. 마치 낚시를 하는 것처럼 모두들 불가에 의자를 가져다 앉고 지지대에 막대를 고정해서 천천히 빵과 소시지를 구웠다. 




만난 지 겨우 한 달 혹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우리는 천천히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때론 까맣게 타오르는 것처럼 부딪히기도 하고 덜 익은 반죽처럼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통했다. 베티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의자를 들고 마당에 나가 잠깐이라도 명상을 즐겼고 영국에 딸을 유학 보낸 야스민은 행복한 표정으로 자주 딸의 사진을 보여주고 이야기했다. 덴마크에서 학교를 다니는 에코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노년 사회 문화 복지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빵과 소시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구우며 농담을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Snobrød는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구워야 오래오래 그 시간을 견뎌내며 맛있게 익는 빵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빵을 뜯어 먹으며, 또 옆 사람의 빵을 나눠 먹으며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노르뷔의 풍경이 낯익어 오랜 기간 머무른 것 같지만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떠나온 날을 생각하면 벌써 한 달이 흘렀나 싶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와 달리 최근 며칠은 사람도 많아지고 일도 바빠서 어서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들었다. 사람과의, 특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은 한국에서의 아르바이트 생활이 떠오를 만큼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떠날 날을 꼽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조금만 버티자, 하는 생각을 했다. 버티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떠나오기 직전, 한국에서 바쁜 생활을 하던 때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만 버티자.


그렇게 마음이 지칠 때면 동네 산책을 했다. 큰 목적 없이 이곳까지 왔고 버티기 위해 온 것은 더욱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아등바등할 때면 잠시 다 내려놓고 걸었다. 아무런 목적지 없이, 바라는 것 없이 그저 꽃을 보고 하늘을 보고 조용하고 작은 마을을 걷다 보면 이곳에 있는 내가 느껴졌다. 이 풍경 속을 걸으며 그저 걷는 내가. 그러면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된다. 나는 산책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다고. 그렇게 어떤 ‘목적’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한결 깨끗해져서 돌아온다. 



남은 날을 꼽아보자 지금 이곳의 풍경들이 더없이 그리워졌다. 벅찬 감동을 주었던 노을과,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호숫가와 아이스크림, 한적하고 조용한 길가와 새소리. 바쁜 식당 일과 사람들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결국 이곳도 삶이구나 했지만 그럼에도 이 마을은 내가 꿈꾸던 삶의 풍경에 거의 들어맞는 곳이었다. 이 마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가득했다.



특히 벌써 그리운 곳은 잔잔한 물결이 이는 호숫가다. 작은 잔디와 벤치, 하늘과 나무가 비치는 조그마한 호수. 이 마을에 처음 왔던 날, 호수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책을 읽던 때가 꿈같다. 그곳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소음 하나 없이 과한 것 없이 볕과 하늘과 새소리가 모두 나를 품어주는 곳. 때론 책과 함께, 커피와 간식을 싸서, 혹은 맨몸으로 자주 그곳에서 걷고 앉아 있었다. 이 섬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 호숫가가 생각날 것이다. 간절하고 마음 저리게. 바쁜 일상을 살다가, 언젠가 지친 날이면 잠시 멈춰 서서 그곳을 떠올리며 위로받을 것이다. 여행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를 얻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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