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현 Dec 10. 2019

새로운 여정을 향해

19.06.15 삼쇠섬 37일차(덴마크41일차)

이 푸름 앞에서 기분 나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삼쇠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덴마크에서 맞이하는 생일이다. 가족과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와 함께 부리나케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네시 오십분. 오랜만에 맞이하는 맑은 정신이다.




우퍼 하우스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뮤슬리는 다른 우퍼들의 아침으로 남겨두고 빵 한 조각과 소시지 하나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다른 건 몰라도 스티니가 직접 만든 이 빵은 벌써 그립다. 레시피를 물어볼까 했는데 만드는 과정을 보니 집에서는 만들기가 힘들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언젠가 정말 그리운 날이면 우프 메시지로 물어봐도 될 테니까. 그 어느 때보다 맛있는 식사를 끝내고 남은 짐들을 챙겼다. 코펜하겐에서 삼쇠로 떠나올 때 무거운 짐 때문에 너무 고생했던 터라 한 달 생활 후에는 꼭 짐을 줄여가자고 다짐했었는데 오히려 자질구레한 짐이 더 늘었다. 이런저런 기념품과 결국 아시안 마트에서 사버린 고추장과 참기름까지. 큰 짐들은 아니었지만 가방 구석구석에 챙겨 넣다 보니 금세 빵빵해졌다. 나서기도 전부터 걱정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텅 빈 방과 주방, 거실을 사진에 담고 집을 나섰다. 아직 텔레버스 예약시간이 남아 가방을 마당으로 옮겨놓고 사진을 몇 장 더 찍으려는데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now! now!”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가방을 옮겨놓으러 나갔던 쇠얀이 들어왔다. 아직 예약시간이 남았는데 금방 도착한 버스 기사가 얼른 나오라며 소리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덴마크에 와서, 특히나 삼쇠에 와서는 결코 불친절하거나 소리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던 터라 순식간에 짜증이 밀려왔다. 더욱이 우리가 잘못을 한 상황도 아니었던 탓에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이내 무거운 짐을 이끌고 작은 벤 앞에 도착했는데 기사는 짐을 실을 수 있는 뒤쪽 문도 열어주지 않고 높은 턱이 있는 앞쪽 출입문으로 짐을 실으라고 했다. 처음 삼쇠에 도착해 텔레버스를 탔을 때는 분명 무거운 짐을 실을 수 있는 간이 승강기가 달린 뒤쪽으로 기사가 직접 짐을 실어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 쇠얀에게 물으니 타냐비야에 사람을 한 명 더 태우러 가야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곧장 항구로 가야 딱 맞게 배 시간을 맞출 수 있는데 갑자기 다른 곳을 경유하게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힘겹게 짐을 다 싣고 자리에 앉아 거칠게 속도를 내는 기사의 튀동수를 보면서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했지만 상한 기분을 되돌릴 순 없었다. 결국 타냐비야에서 예약한 손님은 쪽지만 덩그러니 현관에 붙여놓은 채 나타나지 않았고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를 항구로 태워 갔다. 항구에 도착해 낑낑대며 짐을 내리는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기사는 불평했다. 캐리어 바퀴에 달려온 흙이 버스 바닥에 조금 묻어 있어서였다. 행복과 찰나의 여유를 추구하는 덴마크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던 이때, 삼쇠의 여유로움과 사람들의 평온함을 간직하고 싶었던 마음 안에 단 한 사람의 불편한 태도로 인해 안타까운 마지막 인상이 박혔다. 




이방인을 선입견으로 판단하지 않고 일단 환대하는 북유럽 사람들의 관습은 어쩌면 오래전에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농담이긴 하지만 스티니는 점점 더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돈벌이로 여기며 장사가 잘 된 날에는 “more, more”을 외치지만 돌아서면 “저 인간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어”라고 말한다. 섬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항로가 또 생긴다는 소식에 인상을 쓰며 “더 오기만 해봐”하고 불평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환대했고 배려해주었다. 그럼에도 여행객들에게 생각보다 깊게 남는 기억은 배척받았을 때의 설움과 공포다. 버스 기사의 냉담한 뒤통수를 보며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여행자를 배척해서는 안 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모를수록 더욱. 그러면서 출처도 불분명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낯선 이가 선사하는 재앙 같은 이야기들이. 




항구에 내려 푸른 하늘과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지 말지는 나의 몫이라는 걸. 이런 감정이 몰려올 때 털어내 버릴 나만의 방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진한 우유로 만든 초콜릿이 발린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푸름 앞에서 기분 나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