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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Dec 18. 2019

별종들의 희극과 비극―<코미디의 왕>

코미디의 왕, 마틴 스콜세지 감독, 1983

외부에서 불어닥친 어떤 우연이 자꾸만 맴돌 때가 있다. 며칠이고 따라다니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끝내 나를 돌아보게 만들 때가 있다. 나와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런 것만이 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법이니까.


비슷한 취미를 가졌지만 취향이 다른 이와 그 취미를 향유하는 일은 꽤 매력적이다. 나는 요즘 취향이 다른 이와 취미를 함께 하고 있다. 간단한 게임을 통해 이긴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보는 일이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취향과 거리가 먼, 하지만 결국 나를 사로잡고야 마는 영화들을 만나고 있다. 그중 내게 자꾸 속삭이는 영화 두 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코미디의 왕>(1983)과 전작인 <택시 드라이버>(1976)다.      


    


별종 견디기

먼저 보았던 <택시 드라이버>는 그 여운이 짙고 오랫동안 남았다. 어쩐지 서늘하게만 보이는 미국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와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택시 드라이버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 그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구애하기 위해 함부로 그의 사무실에 쳐들어가고, 첫 데이트에 포르노 영화를 보여준다. 그런 구애가 비난당하자 여자를 향해 폭력성을 드러내고 사회의 악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권총을 구입하고 훈련을 거듭한다. 친구나 사회적 활동도 딱히 없이 혼자 공상에 잠겨있고 생각한 바를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의 그런 거침없는 행동은 결과와는 상관없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자꾸만 불안감을 조성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는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좀 더 활기찬 희극 배우의 모습이지만 사회성이 많이 결여된 듯 보이는, 불안할 정도의 어떤 광기가 잠재된 듯 보이는 사람(두 역 모두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담담하고 차분하면서 4차원적인 연기는 일품이다). 


트래비스와 마찬가지로 루퍼트 펍킨은 상식적인 차원의 행동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 봐도 예의상(혹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제리 랭포드(제리 루이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집요하게 그를 찾아가고 허술한 거짓말들을 늘어놓고 끝내 불법적인 상황까지 만드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보는 사람에게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그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기본적인 예의를 차린 듯이 행동하는 제리의 비서, 리셉션의 직원 같은 사람들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회인의 모습, 상식을 가진 이의 모습은 바로 그 사람들이다.


특히 루퍼트가 제리의 스토커 마샤(산드라 버나드)와 손을 잡으면서 상황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된다. 마샤는 한눈에 봐도 정신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타인의 불편함은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루퍼트가 그런 마샤와 모의해서 제리를 납치까지 했을 땐 드디어 우리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마치 이렇게 될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역시 저들은 ‘정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나를 검열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제리의 시선으로, 제리의 비서인 롱의 시선으로, 리셉션 직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제리를 납치한 루퍼트와 마샤의 허술하고 귀엽기까지 한 요구와 행동을 보고 있자면 과연 저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의문이 생긴다. 제리를 납치해서 하는 일이라곤 제리를 위해 만들고 있는 스웨터를 입혀 잘 어울리는지 감상하고, 그에게 왜 자신이 보낸 코미디 연기 테이프를 들어보지도 않고 자신을 내치는지, 왜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는지를 추궁한다. 그리고 그날 밤 제리가 맡고 있던 코미디 프로에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협박한다. 총알도 들어있지 않은 가짜 총을 겨누고서. 


여기까지 오면 뭔가 조금 이상하다. 처음으로 루퍼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그까짓 거 뭐라고 한번 들어나 봐주지. 그래, 이럴 거면 왜 자기에게 연락하고 자기를 찾아오라고 말한 거야, 하고. 그리고 그 협박은 먹힌다. 


제리가 묶여 있는 동안 루퍼트는 방송에 출연한다. 그리고 여태껏 갈고 닦은 코미디를 선보이고, 박수를 받고, 제 발로 순순히 경찰에 잡혀 징역을 산다. 제리는? 제리를 사랑하는 마샤는 루퍼트가 떠난 뒤 포박을 풀어달라는 제리의 말에 순순히 그를 풀어주고, 풀려난 제리는 너무나 손쉽게 마샤를 때려눕히고 아무 위협도 받지 않고 무사히 도망친다. 마샤의 요구는 루퍼트의 것만큼이나 단순했다. 내 편지를 좀 읽어달라는 것. 그뿐이었다. 


루퍼트는 징역을 사는 동안 제리를 납치하고 코미디 프로를 통해 데뷔한 그 날 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형이 끝나고 세상으로 나온 그는 일약 코미디 스타가 된다. 즉 제리를 납치할 때까지만 해도 손가락질당하는 소위 ‘비호감’이었던 그는 당시 최고의 스타 제리를 납치하고 방송에 출연한 어떤 ‘사건성’ 덕분에 돌연 ‘호감’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만약 그가 제리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제리의 비서의 잘 꾸며진 거절에 상식적으로 행동해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래서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방송에도 나오지 못했다면? 과연 루퍼트는 언제쯤 코미디언으로 데뷔할 수 있었을까. 아니, 과연 그는 코미디언이 될 수나 있었을까?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많은 장벽들(리셉션 직원이며 비서, 제리네 집사 등 많지만 단연코 가장 단단한 벽은 무심하고 연기된 가면을 쓰고 있는, 그러면서도 어떤 ‘결정 권력’을 가진 ‘제리’)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감옥엔 갔다 왔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그를 향한 관심과 인기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그의 코미디가 정말로 ‘먹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을 ‘드러냈’으니까. 자신의 진짜 원하는 모습, 꿈꾸던 자신, 자기 자신스러움, 루퍼트스러움을 만인에게 드러내고야 말았으니까. 그 모습으로 결국 사랑받았으니까.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동경과 혐오, 별종이 되거나 괴물이 되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나 자신으로서 세상에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루퍼트는 제리에게 자신의 테이프를 들어봐 달라고 했고 그러겠다는 그의 대답을 그대로 믿었으며 처음 요청 그대로(그리고 승인받은 대로) 자신의 테이프를 들어주는 것만을 원했다. 거기엔 타인에 대한 어떤 위해도 없고 숨겨진 의도나 목적도 없다. 하지만 우린 그를 ‘불편해’한다. 제리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찾아가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전화하는 그는 거북스럽게 느껴진다. 오히려 예의상 개인적으로 전화하라고 말한 제리를(전혀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제리가 자신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제리 대신 루퍼트의 테이프를 들었다고 말하는 비서를(과연 정말 들어보기나 했을까?)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들(거절하고 거짓말하고 속내를 숨기면서도 예의를 차린 듯 보이는)이 ‘상식적’이고 ‘사회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더이상 찾아가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납치하지 않았다면 루퍼트는 끝내 방송에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내가 서 있는 곳을 들여다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나야 하는 사람, 결정할 수 있는 사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보다 만나길 원하는 사람, 결정할 수 없는 사람, 권력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 그런 우리가 루퍼트를 불편해한다. 왜? 그는 우리와 다르니까. 그는 ‘별종’이니까. 결정되어지고 기다리고 참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 말하고 요구하고 끝내 권력에 침범하는 사람. 그들을 향해 내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두 갈래로 새어 나온다. 그만 좀 해, 하고 아우성치는 목소리와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발화되지 않는 목소리.


우연처럼, 운명처럼 내 속에 소리죽인 그 목소리를 다그치는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몸을 던져 타오르듯 소리내고 사그라진 누군가의 목소리. 2019년 10월 14일, 내겐 너무도 먼 설리의 죽음이다.


그의 행동에 대한 이슈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 중 과연 그에게 관심 두지 않은 이가 있긴 했을까? 노브라, 섹스 어필 사진들, 공개적인 연애, sns를 통해 드러나는 4차원적인 생각들은 언제나 이슈거리였다. 뭐랄까, 그의 행동은 너무 날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 앞에서 익히 그렇듯 그 모든 행동들이 ‘불편했’다. 


이 불편함의 행동 양식은 정반대의 것들로 튀어나온다. ‘동경’하거나 ‘혐오’하거나. 시대를 앞서간 아이콘으로 추앙되거나 사회적 상식을 거스르는 혐오 대상이 되거나, 둘은 사실 한 몸이다. 그를 떠받들었던 사람들이든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이든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소리냈던 사람들의 내면은 사회적 권력 관계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욕망이 심각하게 억눌려져 있고 그것을 건전하게 해소할 수 없는 이들,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발화할 수조차 없는 이들, 바로 대부분의 우리들이다. 그만 좀 하지, 굳이 욕 먹을 걸 알면서 왜 저런 사진들을 올리는 거지? 뭐가 ‘문제’인 걸까? 그를 보며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사실 수없이 내가 들어온 목소리들이다. 여자가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밖에 나다녀서는 안 돼, 너무 사적인 연애 모습(남자와 함께 누워 키스하는 모습 같은 것들)을 대외적으로 노출해서는 안 돼, 너의 날 것의 모습을 드러내선 안 돼, 너의 욕망은 꽁꽁 숨겨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욕을 먹을 거고 인신공격을 당할 거고 사회적으로 배척될 거고 죽음을 생각할 만큼 큰 비난을 받을 거야, 그러니 설리는(나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그건 너의(나의) 잘못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가득한, 나를 언제고 옥죄고 있는 무언의 목소리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그 목소리를 그대로 그를 향해 돌렸을 뿐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코미디의 왕, 루퍼트 펍킨이나 가능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일에 관해 페미니즘적 관점의 애도와 사회 비판은 필요도 없다(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여성이고 남성이고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물론 그래야만 한다. 날 것의 인간을 갈고 다듬어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해온 것이 바로 인간 역사가 아니던가. 문명은 곧 다듬어진 얼굴 가면을 만들어온 기술의 다름 아니다. 다만 그 가면 아래에는 누구나 연약한 맨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의 맨살밖엔 보지 못한다. 내가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것만큼(그래야 한다고 강요받는 만큼) 너도 그렇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너의 가면이 살짝이나마 들춰지는 일은 욕먹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고 나의 가면 아래 맨살은 위로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맨살까지 모두 보듬고 살아갈 수야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좀 더 타인의 타인스러움을 그냥 좀 놔둘 필요가 있다. 너에게도 나와 같이 연약한 맨살이 있구나, 너의 맨살은 그런 색이었구나. 너도 나만큼이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일이 힘겹구나. 그냥 그렇게.


더 이상 ‘불편함’이라는 갖다 붙이기 좋은 애매한 단어 뒤에 숨어 타인을 향한 공격을 멈추어야 한다. 원래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일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내 공격을 지탱하는 발판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불편함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식이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일인지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의 자질을 불편함으로 인식하도록 무언가가 조장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는 잠시 멈춰서야 한다. 우리는 이제 좀 그놈의 ‘불편함’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불편함-타인의 숨 없이는 살 수 없는 타인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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