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이창동 감독, 2018
필연은 어떤 우연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 우연이 촉발하는 데에는 길고 긴 필연이 내재되어 있다. 해미와 종수의 우연한 만남은 그들의 삶을 흔들어놓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삶은 자글자글한 진동 위에 구축되어 왔다. 해미와 종수는 삶의 한 가운데서 재회했지만 그들은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만남과 동시에 이별로 이어진다. 오히려 이들의 만남에는 애초에 이별이 깃들어있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동안 고양이를 부탁하는 해미(전종서)와 고양이를 보기 위해 해미의 집에 처음 찾아간 날 종수(유아인)는 서울 생활을 접고 파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날 해미의 집에서 해미와 종수는 잔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든 둘은 각자의 길을 향해 헤어진다. 해미는 여태껏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아프리카 여행길에 오르고 종수는 변변찮은 직업도 없이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이동하는 가운데 잠시 만났고 그 만남은 이들을 삶이 삶 너머로 넘어가게 될 것을 알리는 경종처럼 강렬하고 불길한 기운을 뿜고 있다. 그 기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수는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해미의 방으로 들어오는 조각 빛을 보며 그 에너지를 감지한다. 혹은 사로잡힌다.
종수는 해미의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위해 매일같이 해미의 방에 들리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자위한다. 그 날 감지한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해미와 종수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 만남은 어떤 필연을 촉발시킨다(감지시킨다). 파주의 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해미와 종수는 먹고살기 위해 서울에서 생활하지만 둘 모두 녹록지 않아 보인다. 그러던 중 해미는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아프리카로 떠나기로 하고 종수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로 집을 관리하기 위해 파주로 돌아가게 된다. 아등바등한 삶이지만 돈을 벌고 일상이 있던 서울을 떠나 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어딘가로 향한다. 삶의 영역에서 삶 너머로, 어떤 단절 너머로 향하는 길에 선 두 사람은 만난다. 홀린 듯이 서로에게 끌리는 두 사람은 일상 아래 잠들어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내민다.
해미가 멍한 눈으로 판토마임을 하며 내뱉는 말처럼 그들의 삶은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무언가가 없다는 걸 잊어버림’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 작가를 꿈꾸며 택배 일을 하는 종수나 간헐적으로 판촉 행사를 다니는 해미의 일상은 마치 무언가가 없다는 걸 잊은 채 살아가는 모양처럼 보인다. 가져본 적도 없기에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 무언가가 빠졌는데, 뭔가 중요한 것을 잊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는 채로 이어가는 삶. 혹은 잊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삶. 그들은 만남을 통해, 일상 너머로 향하면서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둘에게는 비슷한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파주라는 그림자.
엄청 힘들었지. 파주의 파는 ‘파, 파 어웨이(far, far away)’의 파인가 고민했다니까. 게다가 독수리가 막 날아다니는 거야. 독수리라니. 서울에서 겨우 두 시간 왔는데, 독수리라니. 머리통이 나만 한 독수리랑 눈이 마주쳤었어. 해외여행 갈 필요가 없다니까?
-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창비, 2019, p.17
서울에서 겨우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파주는 마치 해외에 온 것처럼 낯선 얼굴을 드러낸다. 이른 아침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범람하고 종일 북에서 대남방송을 틀어댄다. 곳곳에 버려진 듯한 비닐하우스가 휘날리고 넓은 밭과 들은 한없이 황량하다. 물론 그곳에서도 삶은 있고 생명이 자란다. 하지만 그곳에 드리운 에너지는 결코 젊은이들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안고 있지만 파주는 끊임없이 서울의 영향권에 있고 생동하는 젊은 에너지를 감당해내기에 너무 고요하다. 파주의 젊은이들은 숙명처럼 서울로 나가지만 결코 파주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그림자는 계속해서 그들을 이동시키고(아프리카로, 방과 방으로, 길 위로) 파주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게 만든다. 파주는 해미와 종수를―벤(스티븐 연)까지도― 자꾸만 끌어당긴다. 끌어당기고 견딜 수 없게 만든다. 파주의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는 세 청년의 뒷모습은 그래서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불길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종수)와 삶의 이유를 갈구하는 여자(해미), 그리고 큰 어려움 없이 일찍이 모든 것을 가졌지만(가졌기에) 공허와 허무를 안고 살아가는 미스테리한 남자(벤), 이들은 오늘날 청년들의 군상이다. 이들이 자꾸만 빨려들 듯 파주로 찾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생동하는 에너지, 생동하는 젊음은 욕망을 먹고 살아 움직이는 곳(서울, 도시)에서는 너무 빨리 소진되는 탓에 시커먼 재만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다. 종수는 파주로 돌아와 처음으로 자기 속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낀다. 하지만 파주에서는 그것을 소진 시킬 방법이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안개 속을 뛰는 것뿐이다. 그 또한 파주가 안고 있는 숙명이다.
저무는 파주의 태양을 바라보며 자기 안의 진동을 느낀 청년들은 이제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에너지를 분출한다(분출해야 한다). 어느새 감당할 수 없는 카드빚에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한 해미는 자꾸만 춤을 추고 운다. 집 나간 엄마의 옷을 직접 자기 손으로 불태우게 만든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온 종수는 안개 속을 달리고 사라진 해미를 찾아 벤을 집착적으로 따라다닌다. 벤은 가진 것 없는 젊은 여자들을 만나고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고 말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타는 불덩이를 안고만 살아갈 수 없어서 춤을 추고 달리고 불태운다. 정동(情動, affects)의 또 다른 이름은 ‘타고 있음(버닝, Burning)’이다.
무언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살 수 있는 삶은 많은 것을 억누른 채 이어진다. 그것들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부재를 통해 존재함으로써 삶을 지속시킨다. 문명은 욕망(정념)을 억누르면서 발전해왔고 욕망의 에너지는 삶을 생동케하는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억압되어야만 일상으로 유지된다. 우리는 꿈을 통해서나 그 에너지를 해소한다.
하지만 억누름의 힘이 강해진다면? 억눌려지는 에너지 또한 팽창하기 마련이다. 취업의 어려움과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노력 여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됐다. 먹고 자고 살아있음을 유지하는 데만도 빚이 생긴다. 숨을 쉬는데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덩이는 타고 타고 타다 못해 썩어들어가고 있다. 잘 태우는 수단도 돈을 가진 이나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태우는 일’은 삶에 큰 위해가 되지 않는다.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만 그것은 삶과 맞바꾸는 일이 됐다. 벌거벗은 채 끝내 자기 안의 진동에 휩싸인 종수가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영화가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후의 삶은 죽음이다(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단절이라는 의미로도). 그러면서 동시에 억누름을 뚫고 튀어나온 욕망의 해소다(종수의 뛰는 심장박동 같은 음악은 영화가 끝난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진다).
내게 글쓰기는 오랜 시간 ‘태움’의 방식이 되어 왔다. 부모를 향해 뱉을 수 없는 패륜의 말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글쓰기로 이어졌고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는 내 안의 타오르는 불덩이가 글로 토해졌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태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해미의 춤과 종수의 글쓰기, 벤의 요리가 그러하듯이. 그래서일까. 다분히 한국적인 공간과 한국 청년들이나 공감할 법한 인물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향해 외국인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쓸쓸하고 서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현대의 청년들은 모두 자기만의 파주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