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2019
당신에게 솔직함을 가장해 건넨 모든 말은 꺼내지 못한 내 진심의 은유였다. 19.3.31 메모
새벽 두시 삼십분을 막 넘어가고 있다. 밤은 고요하고 호흡은 단조롭다. 모든 사물이 숨죽인 채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다. 희미한 불빛이 방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의식은 선명하고 가슴은 울렁거린다. 속에서 알 수 없는 광란이 인다. 견딜 수 없는 문장들이 쏟아진다. 상실과 공허와 격랑의 언어가. 괴물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잔잔한 밤을 휘몰아낸다.
때때로 삶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얼굴이 있다. 돌연 출현한 낯선 얼굴은 순식간에 일상을 뒤흔든다. 일상은 정지-되고 과거와 현재는 뒤섞이며 모든 것이 의문스러워진다. 단단한 자아는 상실되고 타자의 시선으로 가득 찬다. 격동하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비집고 나오는 문장들은 모두 비어있다. 결코 진실과는 무관한 단어들을 배설할 뿐이다. 그 밤을, 그는 알고 있다. 당신과 내가 아는 바로 그 밤을.
의식은 일상을 빚는다. 언어는 나를 대변하고 당신을 이해하게 하며 우리를 설명한다. 다만 의식 아래, 언어의 뒷면에는 괴물이 있다. 이성은 괴물을 낳으며 괴물은 이성을 움직인다. 바로 그 두 얼굴이 한 몸처럼 삶을 이루고 있다. 당신과 나의 관계는 수많은 이해와 오해로 직조되어 있다. 사랑을 확인하고 돌아온 밤 불면에 허덕이는 것은 만들어낸 불안이 아니다. 잔잔한 수면 아래엔 늘 용암이 끓고 있다.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을 ‘괴물’로 이해하는 것은 오독誤讀이 아니다(그 이름을 들었을 때 최고 지성의 과학자가 아니라 괴물을 연상시키는 당신은 무지한 것이 아니다). 이성의 극단을 추구했던 그에게 괴물은 필연이다. 강박의 짝패는 분열이므로.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을 과학 소설의 고전으로 읽는 것은 반만 맞다. 이 이야기는 그(메리셸리)의 지적 역량의 산물임과 동시에 정념의 기록이다. 괴물-정념의 얼굴-은 필연적으로 과학-이성의 정수-의 소산이다. 그가 과학자의 손으로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껴안고 살았던 것처럼. 살아내기 위해 무수한 죽음들을 관통해야 했던 것처럼. 괴물은 결국 그의 대변자이면서 그의 삶을 집어삼킨 에너지의 응집이다. 이 괴물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전경린의 염소는 얼마나 고매한가(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정념의 상징물).
유랑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모성의 부재, 가족애와 지적 갈망, 유부남과의 도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떠도는 삶 속에서 그의 존재성은 타자로부터 위협당한다. 통합된, 안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기 힘든 그가 만들어낸 괴물은 여러 조각들을 짜깁기한 껍데기로 구성되고 그 속에서 우글거리는 고통의 크기는 괴력으로 분출된다. 가장 끔찍한 공포는 내 속의 알 수 없는 정념의 덩어리가 태동하는 것, 표출되는 것이다. 살아내기 위해 그는 괴물을-괴물 같은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삶을 그러쥐었다. 이 이야기가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다.
나는 죽을 것이다. 지금 나를 잠식하는 고통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테고, 채울 수도 꺼뜨릴 수도 없는 정념의 먹이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p.302
<프랑켄슈타인>은 자기 안에서 울고 있는 괴물을 향한 애도이며 온 힘을 다해 삶을 그러쥐기 위한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