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7. 코펜하겐 1일차
나는 이제 진짜 여행길에 서 있었다.
하얗고 천정이 높은 방, 분홍색 이불을 덮고 누워 창 위로 빗방울이 발자욱을 남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곳에선 수시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해가 쨍쨍한데 농담처럼 빗줄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보며 걱정 짓는 것은 나뿐인 듯하다. 코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도 호들갑스럽게 뛰지도 않고 가던 길을 딛던 보폭 그대로 그저 걸어간다. 내리쬐는 볕에 호들갑스럽지 않은 것처럼 그저 내리는 비를 그저 둘 뿐이다. 새소리가 잠을 깨우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발을 이끄는 코펜하겐의 어느 동네에서, 겨우 첫날의 반을 보내고 있다.
덴마크의 5월은 부산의 11월과 비슷한 체감이다. 사람들은 가벼운 패딩부터 털이 북슬북슬한 두꺼운 외투까지 아직은 따뜻한 차림을 하고 있다. 그 사람들 곁을 겨우 후드티 한 장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내가 지나간다. 마주 오던 부랑자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의 차림보다 내 모습이 더 안쓰럽다. 발가락을 애써 오므려보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야무지게 쌌던 롱패딩과 경량 패딩, 니트와 발열 내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금 그것들은 저 먼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다.
새벽 1시쯤,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입국 심사를 담당하던 직원들은 밝고 재치 있었다. 별 어려움 없이 심사대를 통과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발음할 수 없는 문자로 이루어진 안내판들이 나타났지만 아직 덴마크는 실감할 수 없는 옛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내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체감할 수 있는 냄새든 풍경이든 뭐든 필요했다. 물론 그보다 더이상 견디기 힘든 피로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더 절실했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수화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개 비슷했다. 무료하고 피로한 표정으로 우린 돌아가는 벨트를 좇아 아직은 정신줄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다 툭, 벨트가 멈췄다. 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시냅스가 뭉텅뭉텅 픽픽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한시의 공항은 조용했다. 직원도 아무도 없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멍하니 섰는데 몇몇 현지인들이 익숙하게 어딘가로 향했다. 한쪽에는 수하물 분실 신고서류가 비치되어 있었고 두런두런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고가더니 그들은 각기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외국인들도 그들을 따라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때까지도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사업차 온 듯한 한국인 세 명이 외국인들과 몇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똑같은 서류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는 우리도 서류를 챙겨 들었다. 낯선 곳에선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무한한 신뢰감이 몰려온다.
한국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상황은 대충 이랬다. 우리가 타고 온 아에로플로트 항공사가 이용하는 국제화물운송회사가 파업 중인 탓에 아마도 화물 수송이 중단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짐이 모스크바에서 멈춰 선 것인지, 혹은 인천에서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새벽 2시를 향해 가는 코펜하겐의 공항에서 나와 완연한 봄날의 한국에서 입고 온 편한 원피스 차림으로 덴마크의 매서운 추위와 캄캄한 어둠을 온 몸으로 맞았다. 여행의 설렘과 덴마크에 대한 환상 따위 돌풍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냥 춥고 춥고 또 추웠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조그맣고 스마트한 두어가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꾸역꾸역 동여 맨 30kg짜리 가방을 통째로 잃어도 내게는 크레딧 카드와 스마트폰이 있었다. 기내에 들고 탄 백팩 하나와 조그만 캐리어 하나를 잘 챙겨들고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일단 이동했다. 다행히 코펜하겐에는 24시간 운행하는 버스가 있었다. 공항을 순회하는 버스는 숙소 근처까지 운행했다.
가방을 방패삼아 덜덜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데 비슷한 또래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그러니까 우리와 같이 꾸역꾸역 챙겨 온 것을 몽땅 잃은 사람이 분명했다. 비상 신호를 켠 사람끼리는 단번에 알아보는 법이니까.
그는 싱긋 웃으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 지금 가방을 잃어버렸어." 그의 그 해맑음이 단숨에 추위를 녹였다. 그의 미소를 신호로 우리는 이 황당한 상황을 곱씹으며 함께 웃었다. 우리는 그에게 분실신고서를 썼냐고 물었고 그는 쓰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럼 숙소는 어디에 있는데? 숙소는 없어. 일단 중심가로 가봐야지. 그는 홍콩에서 온 청년이었고 덴마크 여행이 두 번째라고 했다. 미리 준비한 숙소도 없이, 가져 온 짐도 몽땅 분실하고서 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홍콩에 있는 듯한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낄낄 웃었다. 그를 보며 갑자기 나도 웃음이 났다. 나는 이제 진짜 여행길에 서 있었다.
그와는 나란히 버스에 올라 셀카를 찍고 헤어졌다. 그는 배터리 마저도 없어서 우리에게 보조배터리를 빌려 충전했다. 우리는 그보다 몇 정거장 전에 내렸다. 우리는 서로 여행을 응원하며 인사했다. 그를 실은 버스가 떠나가고 코펜하겐의 새벽 거리가 한눈에 펼쳐졌다. 가슴이 탁 트일만큼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