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0 삼쇠섬 1일차(덴마크4일차)
자연을 동경했던 나는 사실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체감했다.
삼쇠(Samsø)는 덴마크 중앙에 있는 작은 섬이다. 울릉도의 1.5배 정도 되는 크기에 3천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다. 삼쇠는 재생 에너지로 100% 전력 공급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풍력발전을 주력으로 한다. ‘바람으로 돌아가는 섬’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삼쇠의 바람은 거세다.
칼룬보그(Kalundborg) 항에서 약 1시간 반 정도 페리를 타고 삼쇠의 벨른(Ballen) 항으로 향했다. 페리 안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덴마크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도 여전히 얼떨떨한데 섬으로까지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더욱 이상한 나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페리 안 사람들 모두 비슷한 기분인 듯 들뜬 얼굴로 소란스러웠다.
삼쇠에서는 노르뷔(Nordby)에 있는 ‘삼쇠 보이후스(Samsø Bryghus)’라는 유기 농장 및 식당에서 일하며 지낼 예정이었다. ‘Bryghus’는 양조장이라는 뜻으로 알고 보니 삼쇠에서 유명한 양조장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에는 양조장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여름에는 농사지은 작물로 식당을 운영했다. 우리는 농장과 식당을 오가며 일하게 될 예정이었다.
벨른항에 내리자 호스트 스티니가 예약해 준 텔레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텔레버스는 전화로 직접 부르는 조그마한 밴으로 일종의 택시인 셈이었는데 한 번에 예약한 손님들 여러 명을 태워 가까운 순서대로 집 앞에 내려다 주었다. 우리는 다른 관광객과 삼쇠 주민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노르뷔는 삼쇠에서 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 가장 마지막 도착지였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승객들을 한 명 한 명 차례로 데려다주며 섬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넓은 밭과 밭이 이어졌다. 푸른 잎들이 찰랑거리고 노란 유채밭이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그리고 밭 너머 먼 곳에는 푸른 지평선이 이어졌다. 무거운 짐을 낑낑거리며 들고 온 탓에 지칠대로 지친 몸은 섬 전체를 도는 동안 노곤하게 풀어졌다. 잠기운이 서린 눈꺼풀 틈새로 푸르고 고요한 풍경이 꿈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어느새 어스름이 내렸다. 버스는 천천히 어느 마당 앞에 멈춰섰다.
버스에서 내리자 스티니와 킴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스티니와 킴은 정말이지 안데르센 동화집에서 금방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긴 금빛 머리칼을 양갈래로 땋아 내린 스티니는 동화 속 푸근한 아주머니처럼 풍성한 꽃무늬 바지와 빨간 티셔츠 위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킴은 눈같이 흰 수염이 풍성했다. 두분 모두 70세에 가까운 노인이라기엔 크고 건장한 모습이었다. 스티니와 킴은 큰 손을 내밀며 우리와 악수했다. 쇠얀은 덴마크로 떠나오며 일반적인 영어 이름 대신 덴마크식 이름을 썼다. 쇠얀(søren)은 한국에서 ‘철수’ 같은 보편적인 이름이었는데 마침 스티니와 킴의 아들 이름도 쇠얀이었다. 킴은 우리에게 한국 이름을 물었고, 내 이름을 말하자 자기와 같은 ‘킴’이라며 웃었다. 우리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첫인사를 나누었다. 덴마크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는 생활에 대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먼 친척 할머니네에 온 것처럼 금세 풀어졌다.
우리가 생활하게 될 집은 스티니네와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동네를 가로질러 걷는 동안 우리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동네를 둘러보았다. 집들은 말린 해초를 엮어 삼각형으로 지붕을 얹은 덴마크 전통 가옥과 옛 가옥의 구조를 현대식으로 개조한 집의 형태가 많았다. 집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고 집 둘레와 마당에는 꽃과 식물이 가득했다. 집뿐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하나의 정원처럼 각양각색의 꽃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우리는 이미 동화 속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우퍼(wwoofer) 하우스는 조그만 마당을 가운데 두고 창고, 킴의 동생이 살고 있는 집과 함께 ‘ㅁ’자 형태로 붙어 있었다. 우퍼 하우스는 2층집으로 1층에는 거실과 부엌, 화장실 같은 공용 공간이었고 2층에는 우퍼들이 지낼 5개의 방이 있었다. 스티니는 방들을 하나씩 보여주며 원하는 방으로 골라보라고 했다. 방들은 조금씩 달랐는데 기본적으로 침대 2개와 수납장,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차근차근 방들을 돌아보며 점점 근심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묵은 먼지들과 늘어진 거미줄, 어쩐지 쥐가 나올 것 같은 구멍을 얼기설기 가구들로 막아 놓은 벽면, 작동하지 않는 라디에이터와 썰렁한 방. 그제야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실감해버렸다. 유기 농장에서의 생활은 곧 시골 생활이었던 것이다. 자연은 결코 예쁜 색깔로 덧칠된 한 점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 예쁜 꽃 사이에는 이름 모를 잡풀들이 더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고 도시에서는 박멸된 크고 작은 벌레들이 득실거리며 밭을 일터로 삼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는 아무리 청소를 해도 언제나 미세하게 모래 알갱이들이 끼어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크게 상태가 다를 것 없는 방을 애써 골라보며 자연을 동경했던 나는 사실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체감했다.
가장 채광이 좋은 첫 번째 방을 정한 뒤 우리는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털어도 털어도 끝없이 날리는 먼지와 차마 열어볼 수 없는 벽장을 그대로 둔 채 결국 나 자신과 적당히 타협한 뒤 짐을 풀어놓았다. 그렇게 삼쇠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밤이었다.
*삼쇠섬은 평일에는 시내버스가 다니지만 늦은 오후, 주말에는 텔레버스를 이용해서 이동가능하다. 텔레버스는 직접 버스회사로 전화를 해서 예약 가능하며 1인당 30DKK (약 5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