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특별했던 나의 장래희망
장래희망: 개그맨
나의 첫 장래희망은 조금 특별했다.
1999년 우리 가족은 인생의 암울기를 보내고 있었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우리 가족은 망해버렸고, 전주에서 버티고 버티다 서울에서 다시 시작해보자며 막 상경을 한 상태였다. 항상 우울한 대화만이 오고 갔으며 분위기는 항상 어두웠다.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에게는 참 무거운 나날들이었다.
1999년도는 KBS에서 개그콘서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는 무슨 요일에 하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이지만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 건 적어도 개그콘서트를 보는 날 만큼은 온 가족이 웃었다는 것이다.
전파가 안 터진다며 버벅 거리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김영철과 우스꽝스러운 추장의 모습을 하고 빰 바이야~를 외치는 심현섭을 너무 좋아하여 매주 본방 사수하여 대사를 외우고 따라 하였으며, 밴드가 마치는 연주를 할 때면 인생의 모든 게 끝나는 것 마냥 공허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푹 빠져 살다 보니 장래희망이 개그맨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겁이 참 많은 아이였다.
웃긴 대사들을 따라 하고, 실없는 소리로 친구들을 웃기는 걸 좋아하였지만 직업으로 하기에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크게 다가왔다. 개그맨 시험을 봐 보라던 친구들의 말에도 "내가 어떻게 해 그걸", "부모님이 허락 안 할 거야"와 같은 변명으로 회피하였다. 내가 동경하는 직업을 가진다는 설렘보다 실패했을 때의 두려움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선택으로 오랜 시간을 '그때 왜 도전해보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족쇄처럼 달고 살아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군대를 갔다 오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기간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을 고민해 보았으나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책도 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가며 나의 미래를 찾아보려 하였지만 생각보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문득 오랜 시간 나에게 채워져 있던 후회라는 족쇄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내가 그때 개그맨을 도전했더라면.. 지금 난 개그맨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 시험을 한 번이라도 봐봤다면 이렇게 까지 아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 그때는 하고 싶은 게 있었구나'
미련, 후회, 아쉬움, 복잡 오묘한 감정들.
그리고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 미련 지금이라도 끊어보자.
마침 그 해 KBS 공채 시험은 다가오고 있었다.
가볍게 1차 시험을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위하여 여의도역을 나와 KBS에 들어가니 온 몸을 회색으로 칠한 사람부터 겨드랑이에 긴 털을 붙이고 돌아다니는 여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미 모여있었다. 절박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긴 시간 대기를 하며 개그콘서트에서 보던 신입 개그맨들의 안내를 따르다 보니 어느덧 내 순서가 되었다. 시험을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두어 대의 카메라와 서너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문을 들어가서 나오는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준비한 연기와 개인기를 하였지만 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웃기지 못하였다.
그렇게 나의 도전은 끝이 났다.
KBS 별관을 나오고 나니 속은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사실 맨 처음 다른 지원자 들을 본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에 있던 미련은 사라졌었다.
나에게는 절박함 없이 후회와 미련만 가지고 시작한 개그맨 시험이었기 때문에 절박한 다른 참가자들을 보면서 나의 길이 아니라는 걸 은연중에 느꼈던 것이다.
아직도 내가 뭘 해야 할지, 하고 싶은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오랜 시간 남아있던 아쉬움을 놓아주는 경험을 하면서 인생의 중요한 걸 배웠다.
앞으로 나는 후회하는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실패해도 도전을 할 것이라는 것을.
평범하지는 않을 수 있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장래희망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끝이 났다는 건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