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9가지 열매

우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거 아니잖아요

by Eric Kim



비 오던 어느 날, 집으로 가기 위해 탄 지하철.
두어 정거장이 지나자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타셨다.

비도 오고, 빈대떡과 막걸리가 당기셨는지 한 잔 거하게 걸치셨나 보다.
지하철이 움직일 때는 물론이고, 멈춰있을 때도 이리저리 주변 사람 다 밀치고 넘어지며 엄청난 존재감을 보이신다.

뭐라도 좀 잡으면 저렇게 민폐는 아닐 텐데 그렇게 넘어져도 꿋꿋이 일어나 핸드폰만 만지는 걸 보니 정말 한숨만 나온다.


‘이번 역은 미아사거리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문으로 걸어가시는 아저씨. 집은 가고 싶으셨나 보다.

나도 이번 역에서 내려야 하기에, 행여나 발이라도 밟힐까 조심스레 아저씨 뒤에 서자 의도치 않게 아저씨의 핸드폰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 주에는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나눠보죠. 양선 사랑 온유 절제..’

카카오톡 그룹 방에 비틀거리며 또, 오타를 꾸역꾸역 고쳐가며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쓰시던 아저씨. 자신이 술을 절제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나 보다.


시간이 지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지인들과 절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까지 하실 아저씨를 상상해 보니 그렇게 ‘멋’ 없을 수가 없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아저씨를 뒤로하며 집으로 향하는데 계속 뭔가 씁쓸함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거 아니잖아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멋지게 살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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