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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간의 미학 Aug 25. 2024

치열한 현실 안의 해학

Youtube에서 '너덜트'란 코믹 숏무비 채널을 봤다. 그중에서 제목이 "???: 찬물 샤워를 해보세요"가 너무 인상 깊어 글까지 쓰게 되었다. 영상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루틴을 만들며 삶의 변화를 꾀하는 모습을 그렸다. 삶을 바꾸기 위해 동기부여 영상을 보았지만 동기부여 자체에 중독이 되어 동기부여 영상만 볼뿐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동기부여 영상을 보면서 다른 동기부여 영상을 저장해 놓고, 루틴 영상 보면서 이걸 '나중에 볼 동영상'으로 저장하는 나 자신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내 모습인 것 같아 공감이 되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해당 영상의 태그에 있듯이 이 영상은 "동기부여 중독"의 현상을 보여준다. '동기부여 중독' 외에도 비슷한 단어들이 있다. '루틴 지옥', '인정 감옥' 등이다. 사실 루틴, 동기부여, 인정 등의 단어들은 모두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어쩌다 긍정적 단어 뒤에 '지옥', '중독', '감옥'과 같은 단어들이 붙게 되었을까? 이러한 표현은 자신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는 청춘들의 삶의 양태가 때론 안쓰럽고, 때론 지독해 보여서 나오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나름대로 현재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치열한 삶에서 오는 모습들이 지옥, 감옥, 중독과 같은 단어들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청년들만 치열한 삶을 산 건 아니다. 기성세대들도 엄청나게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기성세대들이 외부의 적과 싸웠다면 현재 젊은 세대들은 내부의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라는 점이 차이로 보인다. 기성세대들은 전쟁과 독재, 가난과 경제위기라는 보이는 적들에 대항하며 희망을 발견했다. 보이는 적들을 꺾으면 더 나아질 미래를 그릴 수 있었고,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삶이 개척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반면, 풍요의 삶을 살고 있다는 청년들에게 외부의 적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들은 이미 모든 것이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세상에 나온 수많은 서적과 동영상들은 스스로를 바꾸면 주어진 환경도 배경도 모두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오로지 싸울 대상은 보이지 않는 적인 '내부의 적' 바로 "나 자신"이다. 이겨내고 승리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 과정에서 타협과 격려는 존재할 수 없다. 지독하게 루틴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옥 속에 빠뜨리고,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 동기부여 영상에 중독된다. 스스로 '인정 감옥' 안에서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한다. 


루틴지옥, 인정감옥, 동기부여 중독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단어라기보다 치열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해학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문학사전을 보면 '해학'이란 '선의의 웃음을 유발하여 고통과 갈등을 극복하는 웃음의 정신'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다 보면 얼마나 지치겠는가? 동기부여 영상을 보면서 다른 일을 하기 싫어 또 다른 동기부여 영상을 보는 내가 어이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또 하루 살아갈 힘을 얻고, 찬물샤워를 하며 책상에 앉는 힘을 얻는 것을... 인정을 받아야 다음 일을 할 힘이 생기는 것을... 아이러니한 지금 나의 모습을 보며 한번 웃어버리고 삶의 고단함을 이겨낸다. 그리고는 오늘도 어떤 루틴을 만들지, 어떻게 인정받을지, 동기부여가 왜 되지 않는지 고민해 본다...


'너덜트'의 영상은 예상과는 다르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마지막에 조별과제를 멋지게 해내면서 동기부여 중독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줬고, 시원하게 내 예상에 뒤통수를 쳤다. 어이가 없으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러다 주인공이 아무것도 못하면 나도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고 해야 되나? 그런 내 마음을 제작자가 알아줬나 보다. 그리고 영상처럼 우리는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어려운 일을 극복해 낸다. 아무리 희망이 없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 나름의 방법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를 조금 아껴줘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적이 '나 자신'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실이 어려워 해학을 동원해서라도 이겨내려는 '나 자신'이지 않은가? '나 자신'은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듬어주고 아껴줘야 할 대상이다. 때론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더라도 많이 지쳤음을 알아주고 쉬게 해 줄 필요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오늘은 저녁에 치킨 먹는 날 용서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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