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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Nov 07. 2021

<이터널스> 리뷰

흑백 무지개


<이터널스>

(Eternals)

★★☆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가 메가폰을 잡고 젬마 찬, 리차드 매든("버키?"), 셀마 헤이엑, 안젤리나 졸리, 쿠마일 난지아니, 리아 맥휴,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로렌 리들로프, 배리 케오건, 키트 해링턴, 그리고 마동석이 뭉쳤습니다. 시상식 시즌을 노린 작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면면들이 모인 마블 스튜디오 신작, <이터널스>죠.



 7천 년 전 지구에 당도한 태초의 존재, 이터널스. 우주적 존재 셀레스티얼의 인도 하에 인류의 번영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던 그들은 매일 인간들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노스 사태로 우주의 질서가 움직이게 되고, 고대부터 이터널스의 천적으로 존재해 왔던 데비안츠가 다시 나타나며 우리의 주인공들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스케일이 커지고 커지더니 이제는 우주와 신화의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서 어렴풋이 소개되었던 셀레스티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충실한 이터널스가 세계관에 합류했죠. 무려 인류의 진화를 도왔다는 도전적인 설정으로 이름부터 테나(아테나), 길가메시, 이카리스(이카루스), 세르시(키르케) 등 장엄한 티를 폴폴 풍기며 각자의 능력과 개성을 뽐냅니다.



 일단 영화가 영화고 집안이 집안이다 보니 기본적인 볼거리는 있습니다. 초인적이고 초월적인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역시나 신적인 느낌 물씬 풍기는 금색으로 화면을 치장했죠.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멋있는 기호와 상징들로 시각화된 능력들은 커다란 화면을 꽉꽉 채우며 기존 마블 세계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선사합니다. 최소한의 웅장함은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형형색색 외양이 눈을 사로잡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특히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사례가 차고 넘치는, 쫄쫄이 입고 코 묻은 돈이나 노린다던 슈퍼히어로 장르의 인식을 바꾼 마블 세계관에서는 그 이상을 보여주어야 하죠. 지금껏 20편이 넘는 영화들을 거치며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룬 세계관에서는 통하지 않는 핑계가 많습니다.



 처음 보는 영웅들이 10명이나 됩니다. 이름도 어렵습니다. 존재가 예고된 적도 없고, 기존 영화들의 직접적인 연장선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뉴페이스 무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도 안착한 전례로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엔 워낙 머릿수가 많은데다 노는 물도 비교가 되지 않으니 훨씬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터널스>는 꽤나 뻔뻔합니다. 마치 <이터널스 2>라도 되는 양 주연급 인물들을 구면인 양 꺼내듭니다. 시간차를 두고 한 명씩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등장 타이밍이 늦어 늦게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새로운 얼굴이 나올 때마다 그를 파악하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터널스>는 그러지 않아도 긴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할애하고 있죠.



 모르는 사람을 갑자기 눈 앞에 들이대는 연출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터널스>를 제외하거나 장르를 불문하고도 등장인물이 많은 영화는 더 있죠. 하지만 <이터널스>는 완급 조절 자체에 실패했습니다. <스타 워즈>를 방불케 하는 오프닝 크레딧으로 머리를 혼미하게 만들 때는 언제고, 10명의 주인공들이 완전한 관계도로 관객들의 머리에 안착하기까지 영화의 절반 이상이 지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캐릭터에만 국한되는 단점이 아닙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정말 끊임없는 과거 회상을 통해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을 오가는데, 이 회상들은 모두 현재 시점에서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를 부연합니다. 영화 연출에서 회상은 당연히 그럴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맞지만, <이터널스>의 회상들은 각자의 시점이 아니라 최후반부 단 하나의 시점을 위해 영화 내내 분배되어 있죠.



 때문에 최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이야기는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독립된 기승전결을 가진 뒤에 최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실로 그 판도가 뒤바뀌는 구성이 아니라, 딱 봐도 중요한 조각 몇 개가 빠져 있는 상태가 최후반부까지 지속되니 답답함이 더욱 큽니다. 아직 말해주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저 인위적인 폭발력을 위해 그를 끝까지 숨긴다는 것이죠.


 동기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있어도 나중에 말해주겠거니 하면서 넘어가야 하는데, 전말이 밝혀진 뒤에도 이 의문들은 딱히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의문들을 낳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판의 크기만 키우는 터라 더 좋거나 똑똑한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물이 되어 버리고, 이는 또 다시 인물과 사건의 설득력을 크게 떨어뜨리죠.


 여기에 산만한 편집과 엉성한 CG, 어설픈 유머가 더해집니다. <노매드랜드>의 감독이고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산만한 편집이라는 수식은 뒤죽박죽인 회상을 포함하지만, 단순히 액션 연출만 보아도 장면의 맺고 끊음이 어색하죠. 2억 달러라는 제작비가 무색한 CG까지 얹으면 우주를 배경으로 하거나 속도감, 타격감이 생명인 몇몇 장면은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결점들은 멀쩡한 전개에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덜어내야만 하는 장면들이 더욱 많이, 그리고 자주 갖고 있는 통에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죽었는지 대강 다 알게 된 캐릭터가 정말로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는 그대로 굳이 집어넣는 등 대화나 상황을 통해 관객들의 상상에 맡겨도 충분한 장면들이 연출마저도 떨어지죠. 화면은 느린데 전개는 빠른 이질감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SF나 판타지 영화들이 종종 저지르곤 하는, 본인들이 만들었으니 본인들 마음대로 설정하겠다는 외침도 영화의 완성도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각본이 싸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그냥 눈 뒤집혀서 싸우는 질병이 있다며 둘러대고, 갈등을 심화시켜야 하는 순간에는 서로 이유 모를 진화를 해냈다며 퉁칩니다. 이렇게 속 편한 선택들은 불필요한 잔가지를 만들어 크나큰 설정 구멍들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이 모든 설명과 연출엔 하나의 일관적인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를 향하죠. 애초에 다양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형상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터널스의 멤버 구성만 보아도 짐작이 가능한 메시지입니다. 다양성이라는 가치 덕에 번영하고 끊임없는 놀라움으로 가득한 인류라는 존재의 가치, 그리고 그런 인류를 바라보는 인류애의 가치죠.


 클로이 자오의 색이 드러나는 부분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여기입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눈이죠. 외면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넘어 내면, 그리고 또 내면으로 들어가 뿌리에 도달합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기억이라는 존재, 그 기억을 만들고 쌓아가는 인류의 존재를 전지적 시점에서 풀어내죠. 이터널스니 데비안츠니 셀레스티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태초의 존재치고 놀랍도록 1차원적인 캐릭터들의 단편성은 우리의 주인공들이 각자 이 메시지의 한 문장씩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논법은 그 가치를 어렵게 드러내는 대신 그냥 누가 물어보면 대답하는 방식일 텐데, 셀레스티얼과 데비안츠의 질문에 이터널스와 인류가 역할을 나누어 대답하는 구조인 것이죠.


 하지만 <이터널스>는 이처럼 영화 너머의 메시지를 곱씹게 할 전제 조건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전작과는 달리 화면과 대사로 직접 때려꽂는 덕에 억지로라도 그 방향으로의 감상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단점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해야만 가능한 감상이죠. 연출의 의도들을 감성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많으나 기본적인 장르의, 시리즈의 서류 심사에서 걸러지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입니다. 분명 기존의 마블 영화들과는 차별점을 갖고 있지만, 그를 무기로 내밀기엔 들어올릴 힘이 없습니다. 세계관에 야심차게 도입한 수많은 설정들은 마치 실망스러운 결과를 예상이라도 한 듯 영화 안에서 매듭이 지어지고, 막상 그와는 딱히 상관없는 새로운 복선과 떡밥들만이 후속을 예고하죠. 새로운 것이 좋다는 일념에 영화의 안과 밖으로 지나치게 심취한 결과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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