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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y 17. 2022

<드롭아웃> 리뷰

기어이 바다를 넘치게 한 방울들


<드롭아웃>

(The Dropout)

★★★☆


 이제는 정말 이것보다 큰 사건이 벌어질 수는 없겠다 싶은 나날이 지나가도 언제나 세상은 또 새로운 사건들로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합니다. 다들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한 2010년대에 벌어진 테라노스 사건을 TV 시리즈로 옮긴 <드롭아웃>이죠. 아만다 사이프리드, 나빈 앤드루스, 윌리엄 H. 메이시, 스티븐 프라이, 딜런 미네트, 에본 모스-바크라크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스탠포드에서 상위 10%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할 정도로 촉망받던 엘리자베스 홈즈. 실리콘밸리 신화들을 보고 자란 그녀에겐 누구보다 성공한 사람이 되리라는 원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방울의 피로 수십 수백 가지의 질병을 검진할 수 있다면 너무나 좋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타고난 추진력과 의지는 폭주기관차가 되어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종착지를 향합니다.


 제니퍼 로렌스를 주연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던 듯한데,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TV 시리즈는 미처 소식을 듣지 못했었네요. 포스터에 적혀 있듯 훌루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되었으나, 국내엔 훌루가 서비스되고 있지 않은 관계로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어린이날 덕에 만들어졌던 지난 연휴를 쏠쏠히 채워주었더랬죠.



 먼저 만드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근래 이보다 영화화하기 좋은 실화는 없었습니다. 실체라고는 없는 기업에 전 세계 유수의 인사들이 엮여 수천억 원의 돈이 오갔으나 결국 바닥을 뚫고 내려갔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굴러갔기에, 어려운 전문 지식도 필요없는 단 한 번의 의문을 던지지 못해 사건이 이 규모로 커졌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소재죠.


 테라노스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존의, 지금의 혈액 검사는 필요로 하는 피의 양도 많았고 방식도 (표현하자면) 원시적이었습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는데 비용 또한 미국의 골치아픈 의료보험 체계와 맞물려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홈즈의 테라노스는 주삿바늘이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키트로 극소량의 피만 채취해 최첨단 기기를 필요로 하는 검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죠.



 겉보기엔 당연히 혁신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존의 방식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나은 걸 넘어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기술이었죠. 도대체 왜 아무도 이렇게 간편한 방식을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효과적이었습니다. 21세기의 젊은 기업가들이 내놓았던 일상의 혁신은 모두 그런 방식을 따랐기에 누구든 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으니, 아무도 테라노스가 자신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을 정말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대외비 내지는 원천 기술이라는 단어가 가린 테라노스의 뒷짐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주 당연하고 근본적인 의문은 테라노스의 상승세를 향한 회의로 매도되어 폭격이 떨어졌고, 그를 견딜 힘을 갖춘 사람은 너무 늦을 때까지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얽힌 이름들이 너무 거대했습니다. 오라클 창업자에 오바마와 바이든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이 별처럼 쏟아졌습니다. 테라노스를 의심하는 것은 어느새 미국의 일부를 의심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물음표 하나를 표시하기에도 너무 많은 것을 걸어야 했고, 그를 등에 업은 엘리자베스 홈즈의 자아 효능감은 가히 전지전능함에 이르렀죠.



 자잘한 것은 건너뛰고 큰 그림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 테라노스를 지금의 테라노스로 만들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의 대결이나 사이코패스 악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얄팍한 일대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판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가 <드롭아웃>이 테라노스 사건을 영상화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악의 잣대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홈즈만 해도 처음엔 정말 무언가 해내고 싶고 세상에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꿈으로 가득한 청년이었죠. 하지만 순간의 작은 판단들이 모였고, 자기부정에 따라붙은 자기방어가 가속을 붙여 멈출 수 없는 질주가 되었습니다.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들의 내면과 사연까지 챙기는 여유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 시리즈들만이 갖고 있는 특권입니다. <드롭아웃>은 그 또한 놓치지 않죠. 서니, 이안, 에리카, 타일러 등 당연히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각본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조연들이 꽤 많습니다. 이는 다시금 엘리자베스와 테라노스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되구요.


 이처럼 사실의 전달보다는 탐구에 가까운 터라 실화 바탕 각본의 장점을 아주 잘 살리는 편은 아닙니다. 테라노스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테라노스 사건의 기본적인 얼개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전개를 더욱 원활하게 이해할 수 있죠. 그래서 이게 왜 일어난 일인지를 보여주기는 하나, 애초에 일어난 일 자체가 비상식적인 터라 그것부터 정의하고 또 설명해야 함에도 필요한 조각들을 건너뜁니다.



 다시 말해 <드롭아웃>만으로 테라노스 사건을 이해하고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약본을 접한 뒤 본편을 비로소 본다는 느낌으로 접근해야 하죠. 일련의 사건들 중 감독과 각본가가 특별히 확대하고 싶었던 지점들이 정해져 있을 뿐이고, 그래서 진짜 어떻게 이게 가능했냐는 의문에 친절한 답변을 주는 내용은 아닙니다.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지요.


 다행히도 그 지점들은 테라노스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궁금해할, 혹은 듣고 싶어할 이야기들로 훌륭히 채워져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를 마냥 악인으로 묘사하지는 않으면서도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로 균형 있게 다룹니다. 가끔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기가 뛰어난 재연과 할로윈 코스프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기는 하지만, 그 종잡을 수 없음마저도 시청자를 붙잡는 큰 동력 중 하나입니다.



 다들 이제 충분히 똑똑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반복됩니다. 매개체가 다를 뿐 사람들은 여전합니다. 자동차를 단 한 대도 만들지 않은 자동차 회사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쟁사보다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평가받거나,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존재 의의라던 가상 화폐가 기존 체제를 추종하기에 남들과 다르다는 논리를 펼쳐 시장 전체를 휘청이게 만든 사건이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죠.


 결국은 자신의 판단이 옳지 않았음을, 틀렸음을 제 때 인정하지 못한 알량함이 모든 것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이제는 인정할 수도 있겠다는 순간은 이미 인정해선 안 되는 시기를 지나 있습니다. 이것을 되돌리려면 여기에 걸린 모든 것을, 지금의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 때 그 시점에 말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는 시간을 연료 삼아 눈덩이가 되죠.



 그러나 <드롭아웃>에 그렇기에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교조적 메시지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없이 작거나 한없이 옳았던 자그마한 물방울이 더없이 크거나 더없이 그릇된 파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후에도 위험을 무릅쓸, 자신을 한 번 더 믿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고,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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