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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May 31. 2022

<봄날> 리뷰

내려갈 때 보았네


<봄날>

★★★


 <현기증>, <팡파레>의 이돈구 감독과 손현주, 박혁권, 정석용, 박소진, 정지환, 손숙 등이 뭉친 <봄날>입니다. 지난 4월 27일 개봉되어 관객수 약 3만 명을 모은 영화로, 당초 <12월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으나 중간에 <봄날>이 되었죠. 언뜻 보면 오래 전에 찍었다가 개봉 시기를 뒤늦게 잡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촬영한지 1년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한때 잘나가던 큰형님 호성. 8년 만에 출소해 보니 남보다 못한 동생 종성은 본인을 애물단지 취급하고, 결혼을 앞둔 맏딸 은옥과 오랜만에 만난 아들 동혁은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따름입니다. 아는 인맥 죄다 끌어모은 아버지 장례식에서 부조금을 밑천 삼아 기상천외한 비즈니스를 기획하던 중, 눈치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호성의 친구 양희가 술에 취해 오지랖을 부립니다.


 줄거리라고 써놓기에도 깜찍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영화들이라면 한 장면, 한 시퀀스로 넘어갈 짧은 이야기를 하나의 영화로 늘렸습니다.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고,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죠. 잠깐 생각하면 딱히 공들일 곳이 없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에 창작 의도를 녹이는 동시에 집중력을 유지하게끔 만드는 데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목 '봄날'은 흔히들 말하는 봄날입니다. 춥고 또 추워서 온기라고는 남아있지 않을 때, 따뜻했던 그 나날을 떠올리며 언젠가 오리라 기대하게 되는 바로 그 봄날이죠. 모든 것이 움트고 잘 풀리기만 할 것 같던 황금기이자 호시절입니다. 보통 창작물의 제목이 이렇게 희망 가득한 단어로 되어 있으면 알맹이는 그 정반대인 경우가 많지요.


 <봄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성은 학창시절부터 주먹 하나로 두려울 것 없이 살아 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그림자에 스스로를 내준 대가로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레드카펫이라도 깔고 자신을 기다려줄 줄 알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세상은 호성 없이도 너무도 당연하게, 너무도 매끄럽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시절에 멈춘 건 호성 본인뿐이었죠.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지만, 그걸 티낼 수도 없습니다. 수치스러움과 자존심이 뱃속에서 치열하게 다툽니다. 당장이라도 소리라도 지르면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습니다. 그래도, 이 와중에도, 나니까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버틴다는 자부심도 한켠에 자리하고 있죠.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황금기는 있습니다. 황금기라는 것은 의외로 상대적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대적인 대비도 있지만, 한 사람의 삶에서도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이 좋았다는 회한도 쉽게 찾아오곤 합니다. 막상 지낼 때는 하루하루 힘들어 죽겠던 나날이 사실은 가장 살아있었던, 가장 뜨거웠던 때임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은 모두에게 꽤나 익숙한 기억이자 감각일 겁니다.



 <봄날>은 장례식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가슴 속의 그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부위를 파고듭니다. 자신의 호시절을 치켜세워주는 친구는 왜인지 모르게 초라해 보이고, 바로 그 시절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통받는 동생과 자식들의 원망 앞에선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그저 끝 모를 사랑으로 자신을 품는 어머니 앞에서는 그 무엇도 아닌 한 명의 철부지 아들이기도 하죠.


 한심하다고 하면 끝도 없이 한심하지만, 마냥 손가락질하기엔 입 밖으로 내놓지 않는 말들이 있어 보입니다. 선과 악의 무게추에 던져놓으면 어쩔 수 없이 정의롭지 못한 곳으로 굴러떨어질 인물임에도 영화는 그런 흑백논리에 넘어가지 않으려 하죠. 힘깨나 썼던 과거마저도 잔혹한 회상 대신 허풍 섞인 대사들로 대체하며 비난의 근거가 아닌 인물의 조각으로 집어넣는 덕입니다.



 잔잔하면서도 분명한 진동이 있는 영화입니다. 비슷한 소재나 비슷한 감성으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만 늘어놓으며 러닝타임을 꾸역꾸역 채우는 영화들도 많은 반면, <봄날>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곳으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휘둘리지 않고 나아가죠. 연령대나 성별 등 절대적인 기준보다도 삶의 곡선이나 거울 속 모습 등 상대적인 기준이 영화의 의미를 좌우할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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