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덜너덜 나풀대는 창호지
<오징어 게임> 이후 그에 못지않은 흥행 시리즈를 기대한 것은 넷플릭스도, 구독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산 흥행 시리즈의 리메이크인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꽤 유력한 후보였죠. <루카>, <손 the guest> 등의 김홍선이 연출을 맡고 유지태, 박해수, 김윤진, 김성오, 전종서, 이원종, 김지훈, 장윤주, 이현우, 김지훈, 박명훈, 이주빈, 이용녀 등이 뭉쳐 꽤 큰 기대를 모았더랬습니다.
통일을 앞둔 미래의 한반도. 남과 북의 사회 체제가 하나로 합쳐지고, 과도기 경제 인구의 혼란은 불가피했습니다. 또 다시 생겨난 빈부의 갈등에 '교수'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나서죠. 남과 북의 노련한 도둑들을 모아 조폐국을 점거, 무려 4조 원의 돈을 훔쳐 달아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조건은 하나, 단 한 명의 인명 손실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총 12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가 절반은 여름, 나머지 절반은 겨울에 공개됩니다. 촬영은 작년 11월에 모두 마무리되었음에도, 시즌이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꽤 특이한 행보죠. 영화 쪽에서는 <신과 함께>나 이번 <외계+인>처럼 먼저 다 찍어둔 뒤 분량 조절을 위해 1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시리즈물을 지향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드라마 쪽에서는 왕왕 있긴 있으나 여전히 생소한 접근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도둑질을 소재로 한 케이퍼 장르의 드라마입니다. 타겟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각자 분업합니다. 이런저런 갈등이 피어나고 음모와 배신이 판치며 계획의 성공 여부도 흥미 요소가 되죠. 일반적으로는 계획의 탁월함이 가장 큰 분기점이 될 텐데, 주인공 일행의 뒤를 쫓는 사람들을 속이는 동시에 관객 혹은 시청자를 동참시키거나 함께 속여야 하기에 머리를 꽤 잘 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공동경제구역>은 원작이 있는 리메이크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모든 트릭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리메이크의 범위라는 것이 워낙 넓어 굳이 계획의 모든 단계를 똑같이 연출하지 않아도 무관하지만, 특이하게도 <공동경제구역>은 원작을 꽤나 충실히 따라갑니다. 분단 국가를 무대로 남북의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을 담기는 했으나, 계획과는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지는 않죠.
원작 시리즈가 국민 드라마도 아니고, 트릭이 똑같은 것 정도는 다소 실망스럽지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계획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캐릭터죠. 도둑질 영화를 언급할 일이 있으면 입이 닳도록 예시로 들곤 하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가 아주 좋은 예시입니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개성으로 계획에 큰 유연성을 부여하죠.
4조를 훔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냥 금액만 무책임하게 부풀려 사상 최악, 사상 최대 수식어를 마음대로 가져가는 행태는 이제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런데 조폐국을 점거하고 인질 수십 명을 잡아두는데 인명 피해는 없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애초에 출발선부터 드라마는 진지해질 생각이 없습니다. 4억도 아니고 4조를 빼내겠다면서 희대의 의적이 납셨습니다.
계획이 그렇다고 해서 꼭 계획대로 흘러가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공동경제구역>의 톤은 생각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일생일대의 사건이 아니라 위험 상황 시뮬레이션을 하듯 누구 하나 진지해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확히, 그리고 냉정히 말하자면 진지한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짓만 반복합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서 4조 작전을 성공해도, 실패해도 어느 한 쪽은 단단히 멍청하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작전의 꼭대기에서 사상 최고의 브레인쯤으로 추앙받는 교수만 해도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을 그 많은 돈이 걸린 일에 몰아넣고는 자신은 밖에서 기껏 잘 보이지도 않는 CCTV 화면이나 들여다보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통제합니다. 상대편 우두머리가 들락날락하는 자신의 카페에 작전 본부를 차려놓은 것도 모자라 밖에서 훤히 들여보이는 문을 달아 놨습니다.
그야말로 긴장 상황을 연출하려는 장치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아둔한 설정의 연속입니다. 동네 은행 터는 영화들도,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들도 이것보다는 탄탄한 계획을 들고 나옵니다. 이런 사람 단 한 명의 계획으로 4조가 털리면 이 사람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 당하는 사람이 모자라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슬하의 모든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
100시간을 갇혀 있어도 헤어와 메이크업이 완벽한 사람들뿐인 이 공간에서 예상을 벗어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극중 굵직한 인물이 총에 맞을 위기에 처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화면이 전환됩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진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자신할 정도로 낡은 연출이지만, 잠시 뒤 이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반전으로 나옵니다.
이러니 두뇌와 두뇌가 맞닿는 장르적 재미가 발휘될 수가 없습니다. 한 쪽의 계략으로 다른 한 쪽이 완전히 말려드는데, 그 대단한 계략조차도 눈알 한 번 굴리면 기승전결이 뻔하디 뻔합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이것이야말로 역사에 남을 사건인 것처럼 몰아가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한껏 과몰입하여 그에 동조하니 누구 하나 살아남을 수가 없죠. 인물도 사건도 대사도 연기도 생존율이 너무 낮습니다.
남북한 분단이라는 소재도 박해수의 베를린을 탈북자로 묘사하는 딱 한 군데에서만 효용을 발휘합니다. 아무런 개성도 힘도 없음에도 매 화 전혀 불필요한 내레이션으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간신히 기억나게 하는 전종서의 도쿄만 해도 북한에서 왔다는 것조차 매 회 까먹을 지경이죠. 출신국은 그저 해당 인물들의 설명을 간소화하기 위한 이마 표찰에 불과합니다.
가장 큰 줄기가 되는 도둑질부터 아무런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니, 거기서 뻗어나오거나 거기에 영향을 주는 주변 이야기들에도 일말의 관심조차 동하지 않습니다. 덴버와 윤미선, 조영민의 삼각관계는 개중에서도 비중과 수위가 역행하며 기어이 최악을 찍죠. 궁금하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끝까지 끌다가 그런 노출까지 보여주느니 예상을 깬 누군가의 죽음 쪽이 훨씬 효율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도둑질을 소재로 한 작품이 갖춰야 하는 재료들만 딱 맞춰서 들고 있을 뿐, 그것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캐릭터도 있고 사건도 있는데, 십중팔구는 존재 자체가 장르적 매력을 해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죠.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금이 한 개씩 더 가는 형국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움직임에 신이 나서 속도를 올리죠.
절반까지 오면서 메인 이벤트는 물론 여러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가 조금씩 풀려나가지만, 나머지 절반으로 그 결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습니다. 어차피 톤은 동일할 것이고, 자기들끼리 심각하고 자기들끼리 심취해 온갖 교훈과 메시지까지 덕지덕지 붙인 도쿄의 독백으로 끝이 날 것이 너무나 자명합니다. 남은 것이라곤 올해의 할로윈 코스튬뿐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