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알을 낳는 바나나들
2015년 개봉되어 무려 1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올린 바나나들이 돌아왔습니다. <슈퍼배드> 시리즈의 마스코트에서 일루미네이션 스튜디오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 <미니언즈2>죠. 원제를 보면 <그루의 탄생> 정도를 부제로 붙여야 적당해 보이지만, 왜인지 국내에선 역시 그루보다는 미니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미니언즈2>를 선택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슈퍼 악당을 꿈꾸는 미니 보스 그루와 그의 충실한 미니언들. 그루의 11살 평생 꿈은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악당 그룹 '빌런 6'에 입단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현실은 차갑기만 한 법, 면전에서 꼬맹이라며 무시만 당한 그루는 악당 본능을 살려 그들의 본부에서 마법 스톤을 훔치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최악의 악당들에게 쫓기는 그루와 그의 곁에서 그루를 지키려는 미니언들의 모험이 시작되죠.
공식 부제와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엄밀히 말하면 이번 <미니언즈2>는 <미니언즈> 시리즈의 속편이라기보다는 <슈퍼배드> 시리즈의 프리퀄에 가깝습니다. 전작은 케빈, 스튜어트, 밥 3인방을 주인공으로 한 미니언들의 이야기가 확실했지만, 이번 2편은 매번 슈퍼 악당을 꿈꾸기만 하던 어린 그루가 본격적으로 큰 물에서 놀게 된 첫 번째 사건을 다루고 있지요.
순간적인 볼거리는 꽤 있습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 미니언식 코미디는 산재해 있고, 숨을 몰아쉬는 신음이 상영관을 채울 정도의 귀여움 농도도 아주 높죠. 다 필요없고 미니언만 보면 지구 뿌시고 우주 뿌시고 싶은 사람에겐 그야말로 영원할 재료입니다. 거기에 <슈퍼배드> 시리즈를 열심히 본 팬이라면 반가워할 카메오 아닌 카메오들도 눈을 즐겁게 하구요.
이처럼 귀여운 맛에 보는 시리즈라고는 하지만, 미니언들만 가지고 뽑아낼 수 있는 장편 각본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몇 분짜리 코미디 단편 정도야 무한대로 찍어낼 수 있어도, 기승전결을 만들어내려면 최소한 의사소통을 하려는 의지나 능력(...) 중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하겠죠. 그러려면 인간이 끼어들 수밖에 없고, 인간의 비중이 늘어나면 <미니언즈>라는 시리즈 정체성이 흐려지는 수순입니다.
그나마 이번 2편은 그루의 등장으로 그 위화감을 최소화했지만, 그렇다고 시리즈 정체성이 아주 굳건한 것은 아닙니다. <슈퍼배드> 시리즈만 해도 3편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이야기의 연료가 다했었죠. 하다하다 아그네스가 유니콘 찾으러 가는 에피소드까지 러닝타임에 끼워넣어 꾸역꾸역 전체 분량을 채웠는데, 이미 미니언들 재롱은 1편에서 다 본 뒤였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갈팡질팡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루가 주인공이고 또 그루를 주인공으로 삼아야 맞지만, 미니언즈 3인방에게 주기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돌려줍니다. 그러다 보니 그루의 캐릭터성을 해치는 순간도 더러 있습니다. 1편 마지막에서부터 이미 희대의 악당 스칼렛 오버킬도 두려워하지 않던 유망주 그루가 길을 걷다 납치를 당하는 모습이 대표적이겠죠.
여섯 명씩이나 묶어 새로 등장한 악당 쪽은 매력이 전무합니다. 장 클로드(Jean-clawed)나 전과자 음반 가게(Criminal Records) 등 말장난을 활용한 작명 센스 정도만 제외하면 누굴 어떤 사람으로 바꾸어도 무관한 만화 악당들이죠. 영화의 중심 소재로 나오는 마법 스톤마저도 그의 고유한 특징과 관련된 서사가 전무한지라, 돈 가방부터 도시락에 이르기까지 아무 물건이나 갖다놓아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상 그루의 스승이자 멘토가 되는 공포의 검은 장갑이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슈퍼배드> 3부작 내내 일언반구도 없다가 튀어나와서는 악당 그루의 정체성이 이 사람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당연히 쉽지 않겠죠.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는 감정선이나 악당의 따뜻함 등등 좋고 깜찍하긴 한데, 시리즈 프리퀄 자리에서는 썩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입니다.
그래도 그루 쪽 이야기는 어디론가 전진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니언들의 이야기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제자리를 도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고작 87분밖에 되지 않는 러닝타임에도 미니언들의 분량이 늘어날수록 처질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미니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닿아 있는 순간에 각본을 진행시키려면 미니언들의 대화만큼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전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차이나타운에서 쿵푸를 수련해 십이간지와 대결하는 그림도 꽤나 뜬금없지만, 그루와 악당들이 스톤을 놓고 벌이던 싸움에 미니언들이 끼어드는 순간 지금까지의 복잡한 무대 준비가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마침표를 찍어 버리죠. 미니언 쪽이야 원래 쌓아 온 것이 없었지만, 나름 진짜 주인공 자리에서 캐릭터의 유년 시절이라는 공백을 채우던 그루에겐 아쉬운 일입니다.
<슈퍼배드 3>의 감상과 얼추 비슷합니다. 캐릭터의 태생적인 매력으로 어찌저찌 영화 하나 분량은 채우는 데 성공했지만, 정말 바닥까지 긁어모아 억지까지 살짝 부렸습니다. 그럼에도 그 매력이 원체 다른 영화 혹은 캐릭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 그렇게까지 크게 티가 나지는 않습니다. 이 귀여운 바나나들의 활약은 아직도 새로운 팬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벌써 어마어마해진 돈방석이 그를 증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