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을 잇는 탄도
<오징어 게임>으로 한 번에 전 세계급 인지도를 확보한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입니다. 당초 몇 년 전 <남산>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어 한재림 감독의 손에 먼저 들어갔었다는데, 지금 그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과 경쟁작이 되었으니 서로 기분이 참 묘하겠네요. 팬들에게 '청담 부부'라고 불리는 이정재-정우성을 주연으로 전혜진, 고윤정, 허성태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고위 관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와 국내팀 김정도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읻 '동림' 색출 작전을 시작합니다. 스파이를 통해 대통령 순방 일정을 비롯한 일급 기밀사항들이 유출되어 위기를 맞게 되자, 해외팀과 국내팀은 서로를 용의선상에 올린 채 조사에 박차를 가하죠.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이 스파이가 되어 제거되는 상황,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이 둘을 기다립니다.
평균 이상의 재미는 곧잘 보장하는 첩보 영화입니다. 할리우드의 경우 최첨단 기술을 끼워넣은 현대식 첩보 영화들도 곧잘 만들어지고 있지만, 한국 영화들의 경우에는 <공작>, <남산의 부장들>, <베를린> 등 시대극과의 조화가 좀 더 잘 되는 편이죠. 이번 <헌트>는 80년대 제 5공화국 시절을 무대로 한 것을 넘어 실제 사건들과 실제 인물들을 극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흥미를 더욱 끌어올렸습니다.
첩보 영화가 갖는 무기라고 한다면 크게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은 없지만, 하나는 액션이 있겠죠. 특정 기관 소속으로 몇 년, 많게는 수십 년의 경력을 지닌 요원들은 말 그대로 인간 병기가 되어 모든 상황에서 극한의 전투력과 생존력을 선보입니다. 총기와 총기, 맨몸과 맨몸이 맞부닥치면서 벌어지는 액션씬들은 화려함과 절제됨으로 또 나뉘며 영화의 방향성과 상업성에도 영향을 미치죠.
다른 하나는 두뇌와 심리를 이용한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공방전이 되겠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떤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깔리고 또 회수되는 복선은 영화의 깊이를 더하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료가 되고,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관객들에게도 각자의 입지 혹은 의견을 확인하거나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헌트>는 여느 영리한 첩보 영화들이 가는 길을 따르는 영화입니다. 두 무기 중 어느 한 쪽도 놓치지 않습니다. 영화를 여는 액션부터 강렬합니다. 두 주인공인 박평호와 김정도는 하나의 타겟을 쫓습니다. 총기를 사용하는 데에도 거침이 없고, 수류탄을 거의 몸으로 받아냈음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둘 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질주를 멈추지 않기에, 해당 장면의 끝에서 예고되는 둘의 대립은 많은 것을 예고하죠.
없으면 만들어서 가져오는 능력을 업적으로 칭송받던 그 때 그 시절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 뒤 스파이의 존재를 알립니다. 이미 어느 쪽도 스파이를 똑바로 색출해낼 시간도 여력도 없는 상황, 내가 스파이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상대방이 나를 스파이로 몰아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죠. 그렇게 애먼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진짜 스파이는 여전히 활개를 치며 또 다른 방식으로 둘의 숨통을 죄어 옵니다.
액션과 메시지의 조화가 훌륭합니다. 보통 비슷한 소재를 택한 영화들은, 특히나 <헌트>와 똑같거나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택한 영화들은 실화에 어느 정도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의 이야기들이 워낙 무게감이 있어 영화의 중심 소재로 택하기가 쉽지 않고, 그 무게를 짊어지기로 결심한 영화라면 당연히 완성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죠.
그런데 <헌트>는 시대와 사건의 일부만 빌려 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입니다. 잃은 것은 많은데 얻을 것은 많지 않은 길이죠. 뭐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실화의 무게에 눌리거나 치여 무너지기 십상이고, 실화 자체에도 충분한 흡인력이 있기에 굳이 영화적 각색 정도를 제외하면 바꿀 이유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 시기를 소재로 평가와 흥행 둘 다 잡은 영화와 드라마도 상당히 많구요.
그럼에도 <헌트>는 험한 길을 골라 넘어지지 않고 완주에 성공했습니다. 가상의 독재 상황이나 국가를 상정할 수 있었음에도 실제 역사를 통해 많은 설명과 묘사를 생략해 앞으로 나아갈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 그 현장과, 그 때 그 순간과 엮여 있던 사람이라는 설정을 해당 인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신념의 양분으로 삼습니다.
등장하는 머릿수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포스터에 적힌 이름들 외에도 소위 말하는 주연급 배우들이 카메오 이상의 규모로 계속해서 나오는 덕에 보는 맛도 꽤 있는 편이죠. 물론 보는 맛과는 별개로 우르르 등장하는 이름들이 워낙 많은데다 후반부엔 대화에서 이름으로만 언급되는 등 인물 관계도 파악이 쉽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입장과 퇴장 지점이 있어 따라가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인물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박평호와 김정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의 방향성은 뚜렷합니다. 단순히 권력을 놓고 벌이는 암투가 아니라, 체제와 질서의 신념을 추구하죠. 독재는 또 다른 독재를 낳을 뿐이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입니다. 사람을 부품처럼 소모하면서도 전진을 위한 희생이라고 포장하지만, 전진이 아닌 반복이자 순환에 불과합니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세상이 끝없는 희생을 요구한다면, 그 고리는 누군가의 결단으로 끊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 자리가 주는 보상에 눈이 멀거나 애써 외면하기를 택하죠. <헌트>는 이 기승전결을 국가와 체제에 적용해 풀어냈지만, 이는 권력이라는 것이 결부된 그 어떤 상황에도 적용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초중반부의 강렬함에 비하면 후반부는 비교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영화 내내 벌어지는 스파이 색출 작전이 후반부 하이라이트에 엮여 커다란 폭발력을 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스파이 이야기는 그 직전에 매듭이 지어져 버리죠. 결국 최후반부는 기존의 인물들을 활용해 영화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구간에 가까운데, 완성도나 흥미와는 무관하게 호흡이 일부 끊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박평호와 김정도에게 영화의 모든 것이 몰려 있어 그만큼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로 거듭났지만, 그들을 제외한 사실상 대부분의 인물들은 밀물에 들어와 썰물에 소모됩니다. 각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목숨줄이 오가는 복잡한 관계도에서 오로지 두 주인공 캐릭터의 심경 변화나 특별출연 목록을 채우기 위해 나오는 인물이 너무 많죠. 이들이 엮인 줄거리 전개를 위한 순간적인 허술함도 꽤 눈에 띄구요.
그럼에도 <헌트>는 이미 포화 상태라고 여겨졌던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데 성공한 영화입니다. 그것도 이미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영화들 사이의 옆자리를 비집는 대신, 위와 아래에 새로운 층을 만들어 충분한 여유와 공간을 확보했죠. 빗발치는 총탄이나 대규모 폭발, 결말부의 총성 등 절제된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는 모습조차 감독 데뷔작의 패기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